김유재(1925~1984). 부산교구 소속신부. 세례명 그레고리오. 복관은 경주(慶州). 경상남도 진양군 문산면 상문리(慶尙南道 晋陽郡 文山面 象文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문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를 거쳐 1945년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聖神大學의 전신, 성신대학은 후에 다시 가톨릭 대학으로 바뀜]에 진학, 1953년 3월 동(同)대학을 졸업하고 이해 4월 11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경북 상주(尙州)본당 주임으로 사목한 후,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1957년 부산교구가 신설되자 대구교구에서 부산교구로 이적됨과 동시에 부산교구 참사위원에 피임되었으며, 1962년에는 부산교구 재판소 변호사, 부산교구유지재단 이사에 선임 되었다. 그 후 1963년 해운대본당 주임, 1969년 광안 본당 주임, 1972년 2월 태종대본당 주임, 1972년 12월 부산 중앙본당 주임, 1976년 초장본당 주임, 1981년 구포본당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부산교구의 신심운동에 헌신하여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레지오 마리에 부산코미시움 지도신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부산교구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지도신부,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레지오 마리에 제7쿠리아(초장본당 소재) 지도신부, 198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지오 마리에 제34쿠리아(구포본당소개) 지도신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75년에는 부산교구 사제평의회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구포본당 재임 중 1984년 7월 13일 부산 성 베네딕토 병원에서 사망, 유해는 양산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유산 [한] 金有山
김유산(1760~1801).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남 보령(寶齡)의 역촌(驛村)에서 천민으로 출생. 한때 승려(僧侶)생활을 하였으나 이존창(李存昌)의 권면으로 입교, 그 후로는 역졸(驛卒)의 명색으로 유력교우들 사이에 소식을 전해 주었고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1798년과 1799년 두 번에 걸쳐 북경(北京)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전주(全州)에서 유항검(柳恒儉), 윤지헌(尹持憲), 이우집(李宇集)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 포청, 형조에서 차례로 신문을 받은 후 10월 18일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24일 전주에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과 함께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김유리대 [한] 金琉璃代
김유리대(1784~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율리에타. 시골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상경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수정(守貞)을 결심, 부모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혼담을 중지시켰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를 겪은 후 부모는 냉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히게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궁녀생활을 하다가 궁에서는 천주교의 봉행이 어려워 궁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 집을 장만한 후, 홀로 살면서 열심히 수계(守誡)했고 항상 언행에 조심스럽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으로 불렸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이겨 내고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원영 [한] 金元永
김원영(1869~1936). 신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태어났다. 1882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 10년 동안 공부했으나 1891년부터 신학생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게 되자 이듬해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하였다. 1899년 종현(鐘峴, 현 明洞)성당에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이종국(李鍾國), 홍병철(洪秉喆)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이해 5월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함께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들어가 서귀포 한논(현 西烘里)에 본당을 창설하였다. 그 후 황해도 봉산(鳳山), 함경도 안변(安邊) 등지에서 사목하다가 1904년 경기도 행주(幸州)에 부임하여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1914년부터는 수원 갓등이(현 華城郡 峰潭面 旺林里)본당 주임신부를 겸하면서 갓등이본당에서 운영하던 삼덕학교(三德學校)를 4년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으로 개편했고, 1917년 정식으로 행주에서 갓등이로 전임된 후 한층 더 교육사업을 발전시켜 1927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교사수녀들을 초청, 교육을 전담시켰다. 1933년 황해도 신계(新溪)본당으로 전임되어 3년간 사목하다가 1936년 봄 신부피정차 상경하였으나 피정을 마친 후 몸이 쇠약해져 주교관에서 휴양 중 10월 7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김옥윤 [한] 金玉允
김옥윤(1905~1978).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 한국연합회 3대 회장. 세례명 세자 요한. 수도명 요한 보스코. 1927년 경성전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전기주식회사에 입사, 8.15광복 대까지 근무하였다. 1946년 중앙기공주식회사를 설립, 대표 이사에 취임하고 이어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대한 전기공사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교회활동으로는 1938년 장면(張勉), 정지용(鄭芝溶), 조종국(趙鍾國) 등과 혜화동본당에서 창설된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에 입회하여 1945년 종신서원을 했고, 6.25 전쟁 후 정체된 재속형제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 1961년 임시회장, 서울수련장에 선입되었다. 1962년 혜화동본당 총회장에 임명되어 1964년까지 혜화동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프란치스코 서울형제회 회장, 1978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 한국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평생을 교회활동과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의 활성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1980년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의 수련교재 《작은 형제들의 길》을, 1983년 노인용 큰 글씨 기도서를 발행하고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 새 수련교재의 간행을 준비하던 중 1984년 7월 25일 선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