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본당 [한] 井邑本堂

1901년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로사리오. 현 명칭은 시기동본당이다. 김순문(金淳文) 등 27명의 교우가 모여 1889년 3월 첫 신성리 공소를 열게 되었고 1901년 4월에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초대(1901∼1903년) 주임 신부인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정읍군 내장면 신성리(內藏面 新城里)에 초가 4간의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대지 1,200평도 매입하였다. 2대(1903∼1924년) 미알롱(A. Mialon, 孟錫浩) 신부 때 8간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고, 4간의 사제관과 6간의 사랑방(회합실)을 신축하여 둘레를 돌담으로 쌓았다. 16년간 재임한 미알롱 신부 시대에 정읍본당은 눈부신 발전을 보아, 주보 <알로이시오>를 발간하였으며, 당시 공소는 정읍 10, 담양 3, 장성 8, 부안 4, 고창 1, 도합 26개 공소에 신자총수는 1,000여명 헤아렸다.

3대(1924∼1931년) 페셸(R. Pechel, 白鶴老) 신부가 당시 정주읍 상리(井州邑 上里, 현 정주시 상동)에 함석집 4간을 매입하여 본당을 신성리에서 정주읍으로 옮겼다. 이어 4대(1931∼1932년) 고군삼(高君三, 베네딕토) 신부 때, 상동의 함석집을 팔고, 명덕동(明德洞,현재의 水城洞) 성당 대지를 매입하여 함석집 2채를 건축하고 본당을 다시 옮겼다. 그러나 이후 4년간(1932∼1936년) 주임신부 공석기가 있은 뒤에, 5대(1936∼1939년) 서정수(徐廷壽, 알릭스) 신부가 수성동에 목조 아연 평가 2채를 신축하여 임시성당으로 사용하여 왔으며, 6대(1939∼1944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거쳐 7대(1944∼1947년) 박성운(朴聖雲, 베네틱토) 신부 때 8.15광복을 맞아 현 성당터인 정주읍 기리 청수동(基里 淸水洞)에 일식(日式) 2층 가옥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조하여 이전하였다. 8대(1947∼1950년) 김후성(金厚星, 프란치스코) 신부를 거쳐 9대(1950∼1950. 6) 김이환(金二煥, 스테파노) 신부 때 6.25전쟁이 일어난 종군신부로 나가게 됨으로써 이후 4년간 주임신부의 공석으로 정읍본당은 1954년까지 신태인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10대(1954∼1960년) 김영일(金永鎰,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여 일식 가옥을 헐고, 현재의 성당인 연와제 120평의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본당 주보를 매괴의 모후로 정하고 신평리(新坪里) · 등천리(登川里)에 공소강당을 신축했고, 구량리(九良里)에 공소용 가옥을 매입하였다. 11대(1960∼1961년) 황인규(黃寅奎, 마태오) 신부는 성당 구내에 성모상을 건립, 죽림리(竹林里) 공소 강당을 신축했고 12대(1961. 7. 12∼1961. 12)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는 현 성당의 종각을 증축했고, 13대(1961. 12. 11∼1966년)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회룡(回龍)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14대 김환철(金丸喆, 스테파노) 신부 때 성체회수녀원 분원의 설립과 유치원의 신축 개원을 보았고, 한교공소 강당도 신축하였다. 15대 서용복(徐龍福, 토마스) 신부, 16대 이병호(李炳浩, 빈첸시오) 신부, 17대 정승현(丁勝鉉, 요셉) 신부, 18대 박중신(朴仲信, 시몬) 신부를 걸쳐 19대(1979∼1982년) 강인찬(姜仁贊, 도미니코) 신부 때 수녀원과 식당을 신축했고, 20대(1982∼현재) 박종근(朴鍾瑾, 안드레아) 신부 때에 와서는 제1회 본당의 날 설정 행사와 제2 성당의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이리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정읍본당은 오늘날 정주시 시기(市基) 2동 239의 3에 소재하며, 1983년말 현재 신자수는 2,915명, 공소 10개소이다. 전주교구 관하에 속하는 본당 중 5번째로 창설연대가 오래된 본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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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지 [한] 鄭∼

정원지(1846∼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베드로. 일명 원지. 충청도 진잠(鎭岑)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전주(全州)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 지방으로 이사했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 조화서 집을 습격할 때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체포해 가는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감영으로 끌려갔다. 옥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생각하며 여러 번 눈물을 흘렸으나 함께 갇힌 교우들의 위로와 권면으로 눈물을 거두었고 혹형과 고문도 이겨냈다. 12월 31일 가족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위로의 편지를 남긴 후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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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한] 情慾 [라] concupiscentia [영] concupiscence

하느님을 지향하지 않고 악에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 정욕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구세사에서 연역된다. 구약성서 안에 인간의 죄의식에 관한 대목에서 인간을 악에로 이끄는 힘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적대하도록 충동하는(창세 8:21, 예레 17:9) 내재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아직은 죄로부터 연역되지 않았고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일부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통일체로 보는 히브리적 개념에 따라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서 역시 영과 육의 욕망을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의 욕망’이란 바울로의 표현이 헬레니즘적 이원주의를 연상시키나 그 뜻은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거스리는 전인의 자기주장이다. 이처럼 악한 욕망이 인간의 감각적 삶에서 표현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갈라 5:19-, 에페 2:3) 육체와 감각을 비관적으로 보는 안목은 지양되어 있다. 정욕은 하느님을 적대하는 힘이라고 할 때 정욕의 자연스러움과 그것이 인간 구원에 기여하는 순기능을 간과해 버리기 쉽다. 정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존재하며(로마 7:5, 8:8, 갈라 5:24), 구세사에서 아담의 죄와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정욕과 인간 본성과의 관계 및 정욕의 구체적 발생이 문제된다.

인간을 통일된 단일체로 보던 성서적 관점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이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부들의 사상 가운데에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적 측면을 소극적으로 보는 태도로 채색되었다. 원죄이전 정욕이 없는 인간의 상태가 과성(過性)은혜의 상태인 한 정욕은 인간 존재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고 문제 삼는 교부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펠라지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정욕을 인간 본성의 결핍으로 보았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정욕이 ‘죄에서 연유하고 죄로 유인하는 것’(Denz. 792)이라 하였는데 이는 구세사적 관점에서 선언한 것이며 정욕의 구체적 발생과 실제적 강도가 죄에 의존한다고 본 것이다. 정욕은 초자연적인 것에 반대하는 인간의 자기주장으로 표현될 때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럴 때 구원 경륜 안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정욕은 죄 중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초자연적 목적과 숙명을 거스리는 반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초자연적 자기완성을 저지하는 소극적 실존이며 이 소극성은 감각 분야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모든 분야에 미친다. 그러므로 정욕은 파괴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것은 인간을 절대자의 지위로 높이기도 하고 타락과 자기 파괴적인 의지, 여러 형태의 중독증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욕의 파괴적 성향을 과장해서는 아니 된다. 정욕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며(로마 7:8, Denz. 792) 정욕의 원인이 되는 죄는 인간의 본성을 본질적으로 부패시키지 않는다. 정욕이 지니는 소극성은 반대세력에 의하여 저지되기 일쑤이다. 그 반대세력에는 절대자인 하느님을 그리는 유한한 인간의 영원한 동경,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인간 의지의 영원한 지향성 등이 있다. 이러한 제동이 정욕의 한계를 규정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정욕은 하나의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동하는 움직임이며 선을 지향하는 의지의 경향과 은총으로 인한 이 경향의 실현에 의하여 부단히 좌절되고 완화되는 움직임이다.

정욕은 또한 인간의 투쟁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정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통을 따르게 하고 구속에 참여하게 한다. 구세사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은총의 도움을 받아 정욕을 윤리적 질서에 맞게 점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마침내 정욕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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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한] 丁若鍾

정약종(1760∼1801). 순교자. 명도회(明道會) 초기 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아들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 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 성인 정하상(丁夏祥), 성녀 정정혜(丁情惠)의 부친. 일찍이 상호 이익(星湖 李瀷)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더욱 천주교리를 연구함으로써 교리지식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냉담했어도,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명도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 · 입교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그는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한문본 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평민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 ≪주교요지≫라는 상 · 하 두 권의 교리서를 지어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도 이 책을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낫다고 칭찬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 그는 또한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약종은 원래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살고 있었으나 1799년 기미년(己未年)에 서울로 이사하여 문영인(文榮仁)의 집을 빌어 살고 있었는데, 1801년 초부터 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성상(聖像)과 교리서적,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들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代仁)으로 하여금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포도청에 끌려가 진상이 탄로됨으로써 박해가 가열되었고, 자신도 2월 11일(음)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 것임을 시인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함구하고, 끝까지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함은 오히려 부당하다고까지 항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 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原著, 崔奭祐 · 安應烈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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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한] 丁若銓

정약전(1758∼1816). 약현(若鉉), 약종(若鍾), 약용(若鏞)의 4형제 중 둘째로 일찍이 권철신(權哲身)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779년 주어사(走魚寺) 강학회에 회원으로 참석하여 천주교를 연구하였다. 이어 1785년에는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집에서의 공동집회에 참석하는 등 초기 조선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90년 33세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등 관계에 등용되었으나 점차 반대파로부터 천주교인이라는 모략을 받아 한때 관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는데,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사건으로 다시 서울에 잡혀왔다가, 간신히 사형만을 면하고 우이도(牛耳島)로 유배되어 1816년 59세로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수산학서(水産學書)를 써서 학계에 공헌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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