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준 [한] 兪世俊 [관련] 드브레

드브레(Devred) 주교의 한국명. ⇒ 드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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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실리아 [한] 柳~

유세실리아(1761~1839). 성녀. 축일은 9월 20일. 정약종(丁若鍾)의 후처. 세례명은 세실리아. 시골에서 태어나 20세 때 상처(喪妻)한 정약종과 결혼, 3년 후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으나 이듬해 신유(辛酉)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남편과 전처 아들 정철상(丁哲祥)이 순교한 후 석방되어 양근 마재[馬峴]에 사는 시동생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정하상(丁夏祥) · 정정혜(丁情惠) 남매를 데리고 매우 어렵게 살았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 한 사람이 시골로 피신하라고 권하였으나 “나는 항상 순교하기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라고 거절하고 결국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2세의 교령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12차례에 걸쳐 태장 230도를 맞고 4개월간 옥에서 신음하다가 11월 23일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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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태 [한] 劉性泰

유성태(1789/1794~1828). 순교자. 세례명 라우렌시오. 일명 순지. 충청북도 단양(丹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다. 1827년 정해(丁亥)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에 살던 친척들이 피신해 왔는데 이해 5월 한 외교인의 밀고로 친척, 교우 2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단양 관아(官衙)에서의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사람들이 모두 배교함에도 혼자 신앙을 고수하였으나 관장이 유성태가 배교해야 다른 교우들을 석방시켜 주겠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후 다시 단양 관아를 찾아가 배교를 취소,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충주진영(忠州鎭營)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함경북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 중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 이를 미워한 포졸들이 식사를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그의 순교일은 1827년 12월(음), 혹은 1828년 3월(음)이라고 하며 나이에 대해서도 35세 또는 40세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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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보사항 [한] 留保事項 [라] casus reservatus [영] reserved cases

특정한 고해신부나 교회의 장상들만이 용서해 줄 수 있는 죄나 견책(譴責)들. 이들에 대한 사죄권이 귀속되는 주체에 따라 교황의, 주교의, 수도원장의 유보사항으로 각각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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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제 [한] 劉方濟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세례명 파치피코. 1831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은 조선 교우들의 신부 파견 요청을 접수하여 브뤼기에르(Burguiere, 蘇) 주교의 조선 파견을 지지, 그의 자원을 허락키로 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중국인 신학교에서 7년간 수업하여 사제서품을 받은 유방제 신부는 로마 교황청에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조선에 가기를 지원하였다. 이에 포교성성은 이를 수락하고 먼저 조선에 들어가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보다 먼저 길을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싱가포르를 떠났을 때에는 이미 중국에 들어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1834년 1월 3일 정하상(丁夏祥) 등의 안내로 변문(邊門)을 통과하여 조선 입국에 성공한 그는 16일에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 입구하자 주교의 입국을 준비할 사명을 지니고 주교의 입국을 방해 내지는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주교는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제대로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 신부의 사주에 의한 반감에 부딪쳐, 조선 입국의 길을 찾지 못하고 중국대륙을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방황하다가, 1835년 10월 조선입국 직전에 선종하였다.

이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조선교구 관할에 필요한 전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곧 달려가 주교의 장례를 치른 다음, 1835년 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곧 유방제 신부가 묶고 있는 처소로 들어가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유 신부가 그 동안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사실과, 선교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등 비위사실로 인하여, 조선 교우들의 신앙심을 잃고 있음을 알고는 이를 충고하였으나 끝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부주교의 권한으로 그에게 모든 성무집행을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단념한 유방제 신부는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 고향인 중국 산서성(山西省)으로 돌아가게 되자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가게 된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齊) 등 세 명의 어린 신학생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이후 만주 · 몽고 ·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8개월 만에 그들을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케 하였다. 고향에 돌아간 유방제 신부는 그때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신부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입국하여 주교의 입국을 방해한 것은 조선교구의 관할권이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가자, 양자간에 알력이 생겨, 북경교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출신 성직자들이 뒤에서 이를 조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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