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서 [한] ∼書 [라] Liber Primus Esdrae [영] First Book of Ezra

1. 예비지식 : 이 책은 느헤미야서(느헤미야서 항목 참고)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마소렛 본문의 에즈라서는 70인역의 에즈라 둘째 권에 해당하고 불가타역(譯)에는 제1 에즈라로 표기되어 있다. 불가타의 제2 에즈라는 마소렛 본문의 느헤미야서를 지칭한다. 불가타에 있는 제3 에즈라는 70인역에 제1 에즈라에 해당한다. 이 책은 많은 불가타역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지금 외경(apocrypha)으로 간주되는 이 책은 시나고가(Synagogue)에서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성경으로 취급되었다. 이 책의 특성과 기원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O. Eissfeldt의 구약입문 77을 참고할 것]. 내용으로 보아서는 히브리아 본문과 병행하는 부분이 많으나 다음에 지칭하는 구절은 이 책이 더 수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1:1-20 = 2역대 35:1-19, 1:23-55 = 2역대 35:20-36, 2:1-3a = 2역대 36:22 이하 = 에즈라 1:1-3a, 9:37-55 = 느헤 7:72-8:13a 등이다.

묵시록으로 알려져 있는 불가타의 제4 에즈라는 70인역에서 ‘예언자 에즈라’ 또는 ‘에즈라의 묵시록’으로 불린다. 많은 불가타역에는 그리스도적 요소가 들어 있는 제5 에즈라(=제4 에즈라 1장 이하)와 제6 에즈라(=제4 에즈라 15장 이하)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제4 에즈라(3-14장)는 7가지 현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현시 속에서 에즈라는 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운명, 세상 종말의 표지, 하느님의 오심 등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미래의 이스라엘, 제4 세계 그리고 메시아의 심벌로서 여인, 독수리, 인간의 아들의 형태를 본다. 이 이야기는 에즈라가 예루살렘 멸망시에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구성하여 성경으로 삼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기원후 1세기경 히브리아어 아니면 아라메아어로 쓰였다.

에즈라(히브 ‘ezra’는 하느님의 도움이란 뜻을 지님)는 바빌론으로 귀양간 유태인들의 사제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태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왕 아르닥사싸 9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태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임명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태인과 그 외 많은 성전 봉사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하였다(에즈 9장 이하). 대사제 요하난의 살인 때문에 생긴 동요를 진정시켰다. 그 뒤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학자들 간에 아직도 토론되고 있는 문제는 에즈라가 선포한 법에 관한 것이다. 그 법이 제관기의 특별판(版)이었는지 혹은 모세오경이었는지, 아니면 신명기의 영향을 받은 법이었는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에즈라 9:11 이하와 느헤미야 8:14 이하에 인용된 법이 모세오경에 없는 것을 보아서는 에즈라가 선포한 법이 모세오경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인 듯하나 법을 낭독할 때 새법을 선포하기보다는 있는 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법은 모세오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 내용 : 에즈라서는 1-6장(=귀향의 허락과 성전 재건)과 7-10장(=에즈라의 활동)으로 대별할 수 있다. 1-6장의 재용은 다음과 같이 약술할 수 있다. 기원전 538년 시루스왕이 유태인들의 귀향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여서(1장) 세스바자로, 즈루빠벨 여수아의 인도하에 신자와 성직자들이(2장의 명단 참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곧 제대를 세우고 성전의 기초를 놓고(3장)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사마리아인들이 방해를 한다(4:1-5). 이들은 크세록세스와 아르닥사싸 왕들에게 호소하여(4:6-16) 성전 건립을 중지시키는 데에 성공한다(4:17-24). 그러나 유다 공동체는 성전 건립을 다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고(5장) 다리우스왕은 시루스왕의 허락 명령을 근거하여 계속 짓기를 명한다(6장). 515년에 완공하고(6:13-18) 빠스카 축제를 지낸다(6:19-22).

에즈라 7-10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즈라가 아르닥사싸의 전권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오며 같이 귀향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다97-8장). 성전 광장에서 모이는 기회가 있을 때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에즈라는 보속의 기도를 드리고는 이혼을 결정한다. 약 100쌍이 이혼한다(9-10장).

3. 저자, 자료, 구성 : 에즈라서의 저자는 느헤미야와 역대기를 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대기 편찬자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이 이 세 권을 썼다는 것은 이 세 권에 쓰인 문체, 단어, 정신, 기본사상 등이 같고 에즈라가 역대기 끝줄을 이어 받아서 시작한다는 사실로 알아볼 수 있다. 이 저자는 예절과 성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보아 아마도 예루살렘의 경신례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제라기보다 레위족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내용 중 가장 후대에 일어났던 것이 기원전 400년경이니까 저술은 당연히 훨씬 후(300년경)라고 볼 수 있다.

이 역대기 편찬자는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쓸 때 여러 사료(史料)를 이용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도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음을 상기시켜 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료가 이용됐다고 본다. 첫째 느헤미야의 회고록으로 켈러만(Kellermann)에 의하면(느헤 1:1-7:5b, 12:27a · 31f · 37-40, 13:4-31)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둘째로 에즈 4:6-6:18에 나오는 아라메아어로 된 본문을 들 수 있다. 4:6-23에 나오는 크세록세스와 아르닥사싸와 관계된 것은 역대기 편찬자가 썼기 때문에 연대에 있어 혼돈을 일으키나 이 문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다(Ed. Meyer).

셋째 에즈 7:12-26이 느헤미야 회고록에서 같이 1인칭 단수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연대기 편찬자가 쓴 사료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루돌프(W. Rudolph)는 더 넓게 생각하여 에즈 7:12-8:36, 느헤 7:72b · 8, 에즈 9장 이하, 느헤 9장 이하까지 사료라고 본다. 그러나 문체가 역대기 편찬자의 것을 닮았고 1인칭 단수의 문체도 느헤미야 회고록을 모방하여 썼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사료로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어떤 오래된 재료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있다.

넷째로 들 수 있는 사료는 여러 명단이다. 에즈 1:8-11a, 2:1-67, 8:14, 느헤 3:1-32, 11:25-36 등이다.

이런 자료를 써서 역대기 편찬자가 지금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라고 불리는 한 권의 책을 쓸 때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에 의거한 순서는 크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① 에즈 1-6 = 성전 건립의 허락 – 그 축성, ② 에즈 7-8, 느헤 8, 에즈 9-10 = 법의 선포 – 보속의 전례와 법 준수의 약속, ③ 느헤 1-7, 11∼13 = 성벽건축의 허락 – 그 낙성. 자세히 살피면 이 세 부분의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의 허락 또는 결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끝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전자는 유태인의 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결정권을 갖고 있는 페르시아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유다민족의 존재의 의의를 규정하는 하느님께 대한 성실성과 그에 따른 유태인의 자주성을 견지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 사마리아인과 적이 되는 이웃 민족과 지역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종교는 이념적인 의미에서(예를 들면 이웃 민족과의 결혼을 금하는)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에즈라-느헤미야서의 중요 핵심은 둘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법이, 귀향한 유태인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곤경에 처할 때,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사회개혁의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법과 제사를 통하여 내적 외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법과 제도 중심의 종교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특성 :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지향이 특성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복구, 유다 공동체의 회복 등은 하느님이 당신 약속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하느님의 법이 생활의 중심이라고 설파하므로, 에즈라-느헤미야서가 역대기와 처음부터 한 책으로 쓰여졌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정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역대기와 한 책을 이루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이 옳다면 인과응보의 해석 원칙도 이 책의 의도를 규명하는데 적용할 수 있으나 에즈라-느헤미야서를 독립된 책이라고 본다면 위와 같은 시도는 주의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5. 문제점 : 우선하는 질문은 에즈라-느헤미야서와 역대기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기 역사는 역대기, 에즈라서, 느헤미야서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와 왔으나 노트(M. Noth), 폴만(F. Pohlmann) 등 몇몇 학자는 이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고 윌리암슨(H.G.M. Williamson) 등은 에즈라-느헤미야서는 역대기와 함께 쓰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대하여 군네벡(A.H.J. Gunneweg)이 이견을 내세움으로써 이 문제는 종결된 것으로 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에즈라가 활동한 연대(年代)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재래의견에 따르면(에즈라 7:7 이하) 에즈라는 아르닥사싸 1세 집정 7년에, 기원전 458년, 느헤미야는(느헤 2) 그의 집정 20년에(기원전 445년) 예루살렘에 돌아왔다(Roland de Vaux). 후나커(A. Van Hoonacker)는 에즈라가 느헤미야보다 늦게 활동하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에즈 7:8에 나오는 왕은 아르닥사싸 2세를 지칭하는 것이고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귀향한 해는 398년이 된다. 해결방법으로 파블로프스키(V. Pavlovsky)는 에즈 7:7에 나오는 연대가 틀린다고 하고 슈나이더(H. Schneider)는 기원전 458, 428, 398년이 다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의견도 결정적인 답을 주기에는 미흡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 에즈라의 활동이 느헤미아의 등장보다 늦다고 볼 때 본문의 이해가 쉽다고 생각되나 이 연대 문제는, 역대기적 역사서를 쓴 저자가 여러 사료를 사용하여 자기 책을 쓸 때 연대순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거나 또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沈勇燮)

[참고문헌] W. Rudolph, Esra und Nehemia, Tubigen 1949 / J.M. Meyersm, Esra and Nehemia, N.Y. 1981 / H. Cazelles, La Mission d’Esdras, vth, 1954 / A.H.J. Gunneweg, Zur Interpretation der Bucher Esra-Nehemia, 1981 / A. van Hoonacker, La Succession Chronologique Nehemie-Esdras, RB32, 1923; 33, 1924 / S. Japhet, The supposed common Authorship of Chronicles and Ezra-Nehemia Investigeted anew, 1968 / U. Kellermann, Nehemia, Quellen uberlieferung und Geschichte, Berlin 1967 / K. Koch, Ezra and the Origin of Judaism, 1974 / A. Lefevre, Nehemie et Esdras, DBS V1.Sp. 393-424, ed. Meyer, Die Entstehung des Judentums 1896(1965) / S. Mowinckel, “Ich” und “Er” in der Ezrageschichte, in: Verbannumg und Heimkehr, W. Rudolph 기념논문집, 1961; Studien zu dem Buche Ezra Nehemia, I, II권, 1964; III권, 1965 / M. Noth, 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 Tubingen 1967 / F. Pohlmann, Studien zum dritten Esra, Gottingen 1970 / V. Pavlovsky, Die Chronologie der Tatigkeit dese sdras, 1957 / H. Schneider, Die Bucher Esra und Nehemia, Bonn 1959 / M.A. Throntveit, Linguistic Analysis and the Question of Authorship in chronicles Ezra and Nehemia, 1982 / R. de Vaux. Israel. Exdras-Nehemie, DBSIV / H.G.M. Williamson, Israel in the Books of Chronicle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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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서 [한] ∼書 [라] Prophetia Ezechielis [영] Bood of Ezekiel

예레미야서와는 아주 달리 예제키엘(Ezechiel)의 책은 그 구성이 매우 질서정연하다. 예언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을 보도하는 1∼3장은 전체 책의 서문 역할을 맡고 있다. 책의 본론은 아주 선명하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부분, 4∼24장은 거의 배타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에게 내린 예언자의 질책과 위협을 수록하고 있다. 둘째 부분 25∼32장은 이방민족들에 대한 신탁(神託)들인데, 여기서 예언자는 예의 민족들과 공모하던 불충한 이스라엘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셋째 부분, 33∼39장에서 예언자는 예루살렘 공략 도중과 함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으리라고 위로하고 있다. 넷째 부분, 40∼48장에서 에제키엘은 팔레스티나에 장차 세워질 공동체의 정치적 종교적 구조를 미리 구상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매우 논리적인 이 책의 구성은 상당수의 균열을 노출시키고 있다. 가령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중적(doublets)으로 수록되어 있다(3:17-21 = 33:7-9, 18:25-29 = 33:17-20 등 …). 또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걸리게 한 실어증(失語症)에 대한 보도들은 그 사이에 끼여든 긴 연설들로 인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3:26, 24:27, 33:22). 하느님의 수레에 관한 비전, 1:4-3:15의 본문은 책의 비전의 본문, 2:1-3:9에 의해 중단된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묘사, 11:1-21의 본문은 8장의 연장이며 또 하느님 수레의 출발을 보도하는 이야기를 끊어버리고 있다. 그 이야기는 10:22에서 11:22로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26∼33장에서 나타나는 시대순서는 논리적이 못 된다. 이 같은 문체상의 무질서도 에제키엘서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단번에 쓰여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저자들이 스승의 어록을 편집하면서 어느 정도 개작을 하고 보충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승의 말씀과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편집의 작업이 아주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은 40∼48장의 본문이지만 이 장들의 핵심사상은 어디까지나 에제키엘 자신의 것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전수된 본문에 의하면, 에제키엘은 기원전 593∼571년 사이에(1:2과 29:17에 나타난 연대)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예언자로 활약하였다.

문제는 책의 첫부분에 수록된 신탁들이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며 또 에제키엘 자신이 육체적으로 그 도시에 현존했던 것처럼(특히 11:13)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에제키엘이 장소가 다른 두 곳에서 에언자로 활약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게 하였다. 첫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으니 에제키엘은 그 도시가 멸망한 587년까지 팔레스티나에 남아서 설교했다는 가설이다. 그 다음에 에제키엘이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했다는 가설이다. 2:1-3:9의 두루마리에 관한 비전은 팔레스티나에서 있었던 예언자의 소명을 증거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수레에 대한 비전(1:4-28과 3:10-15)은 유배간 사람들에게 가서 활동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힌다. 문제는 비록 에제키엘이 팔레스티나에서 활약했음을 인정할지라도, 그가 언제나 예루살렘의 성 밖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이상한 것은 예레미아와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에서 함께 설교했다면, 그 두 예언자들이 서로 알고 있어야 할텐데 에제키엘서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8:3에 의하면, 에제키엘은 ‘비전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질책한 신탁들은 유배간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아 둘 것이다. 에제키엘은 흔히 비전 안에서(11:24) 공간을 극복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에제키엘이 두 장소에서 활약했다는 그 전통적 가설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가설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에제키엘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는 대단히 큰 인물이다. 에제키엘의 신분은 사제였다(1:3). 그는 야훼의 성전을 정열적으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걱정했고(8),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그 성전을 안타까워했으며(10), 장래에 세워질 깨끗하고도 거룩한 성전을 세밀히 설계했고(40-42) 드디어 그 성전에 되돌아오시는 하느님을 본 것이다(40). 에제키엘은 사제로서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을 가장 중대시하였다. 그래서 에제키엘은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의 불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20장에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다. 에제키엘은 율법이 금하는 부정(不淨)을 혐오했으며(4:14) 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분하였다(45:1-6). 그는 사제였기 때문에 법과 윤리문제에 대해 관심이 컸다. 에제키엘의 윤리적 판단은 흔히 결의론(決疑論)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18). 에제키엘의 사상과 어휘는 성법전(聖法典)인 레위 17∼26장의 본문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성법전의 영감을 받았는지 아니면 성법전이 에제키엘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증명할 길은 없다. 어쨌든 성법전과 에제키엘서는 서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전수되어 편집된 까닭에, 두 문헌이 사상적으로 비슷할 뿐이다. 하여 예레미야의 작품이 ‘신명기적 사조(思潮)’에 속하듯이 에제키엘의 작품은 ‘사제적 사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제는 행동의 사나이였다. 그가 수없이 행한 상징적 행동들이 예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포위공략을 실제의 상징적 행동으로 보여주었고(4:1-5:4), 유배대열의 출발을 몸짓으로 흉내 내었으며(12:1-7), 정복의 길 위에 서있는 바빌론 왕(21:23 이하)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재결합(37:15 이하)을 몸짓으로 흉내 내었다. 그는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자신이 당한 시련들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표징으로 여겼고(24:24) 또 그것들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하느님의 기호(記號)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제키엘의 상징적 행동과 제스처는 선임 예언자들의 것들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였다. 에제키엘은 특히 비전의 전문가였다. 그의 책은 단지 네 개의 비전[顯示]을 보도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책 안에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크다(1-3, 8-11, 37, 40-48). 이 비전의 세계는 매우 환상적이다. 야훼의 수레를 끄는 네 동물들, 괴상한 짐승들과 우상들이 우글거리는 성전예배의 떠들썩한 춤, 뼈들이 널려 있다가 살아나는 평원, 이상적인 설계에 따라 건설된 성전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꿈같은 강물과 선경(仙境)의 지리(地理) 등이 무척이나 환상적이다. 이 같은 상상력은 예언자가 묘사하고 있는 우의(寓意)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두 자매(23), 때로는 침몰(27), 악어와 같은 파라오(29와 32), 거대한 나무(31), 지옥으로 내려감(32) 등이 그 우의들이다. 하지만 에제키엘의 문체는 그의 다양한 이미지와 형상들의 풍부함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단조롭고 어두우며 차고도 퍼진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문체는 힘 있고 맑은 이사야의 것과 감동적이며 따뜻한 예레미야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박하다. 하지만 에제키엘의 문학적 예술은 하느님의 신비 앞에 인간이 느끼게 되는 거룩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물론 에제키엘이 선임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또 다시 새로운 종교의 길을 개척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하여 그는 사상면에 있어 이스라엘의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물론 그의 책에 성조(聖祖)들에게 한 약속의 기억과 시나이의 계약사건이 여기저기에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에제키엘은 만일 하느님께서 날 때부터 더럽혀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다면(16:3 이하), 그것은 약속을 완성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 이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20)이라고 단언한다. 하느님께서 만일 옛 계약을 새 계약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면(16:60, 37:26 이하), 그것은 백성의 회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순전히 공짜로 내리는 ‘은총’ 때문인 것이다. 이 은총의 하사 이후에 백성의 회개가 뒤따라온다(16:62-63).

에제키엘은 드물게 메시아니즘을 말하고 있으니, 그의 메시아는 왕적인 존재도 아니요 영광의 인물도 아니다. 물론 그가 미래의 다윗을 예고하지만 후자는 자기 백성의 ‘목자’(34:23, 37:24)요 ‘왕자’(24:24)일뿐 결코 대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다. 다윗의 후손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비전 속에서 성전 밖으로 쫓겨난 인물에 불과하다(45:7 이하). 에제키엘은 처벌의 연대성을 강조하던 옛 전승을 부인하고 개별인간의 인과응보의 사상을 단언하고 있다(18:33 참조). 이 같은 사상은 인간의 죽음 이후에 있을 응보사상을 준비하였다. 현실은 언제나 강자의 정의를 옹호했었기 때문이다. 사제로서의 에제키엘은 성전을 매우 사랑했지만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현존이 벽돌로 지은 성전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에제키엘을 통해 지금까지 대립되어 온 예언자의 정신과 사제의 정신은 화해를 한다. 하여 종교적 의식은 그 의식에 영감을 내리는 정신에 따라 자기의 가치를 살리게 되는 것이다. 에제키엘의 사상은 모두 인간의 내적 개혁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18:31). 아니 하느님께서 돌 심장과는 ‘다른 마음’, 곧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시편 51:12-14), 인간의 속마음에게 ‘새로운 영’을 선물로 주실 것(11:19, 36:26)이라고 에제키엘은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공짜로 용서하고 그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내리는 것은 일종의 창조이다. 창조가 은총이듯이 용서도 일종의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의 사죄경(36:25-28)은 은혜로이 새로 태어난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뉘우침을 유발시키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에제키엘의 사상은 사도요한과 바울로의 은총신학을 준비시켰다. 종교의 모든 것을 영성화(靈性化)시킨 것은 에제키엘의 큰 공헌이다. 흔히 사람들은 에제키엘은 유다이즘의 아버지라고 부르니, 그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분리했고 율법적인 깨끗함을 강조했으며 종교의식의 세밀한 규칙을 세웠다는 것 때문이다. 하여 에제키엘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조상으로 본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전적으로 틀렸고 불의한 판단이다. 에제키엘과 예레미야는 각기 서로 다른 인물이긴 했지만 유다이즘과 신약성서의 종교를 준비한 순수하고도 고매한 영성(spiritualite)의 샘물이었다. 예수는 에제키엘이 예고한 의미로(34) 착한 목자이다(요한 10장). 또 에제키엘이 시작한 영성적 예배를 예수께서 확인하고 있다(요한 4:23). 또 에제키엘은 묵시문학적 사조의 기원이다. 그의 웅장한 비전들은 다니엘의 비전들을 예고하고 있으니, 요한의 묵시록에서 자주 에제키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놀랍지 않다. (徐仁錫)

[참고문헌] J. Knabenbauer, 1890 / P. Heinisch, 1923 / G. Pongel, J. Grisson, Aufl. 2, 1934 / L. Tondelli, 1930 / C.v. Grelli, Aufl. 2, 1896 / A. Bertholet, 1897, 1937 / Hermann,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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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레 [원] Eire [관련]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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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티케스주의 [한] ∼主義 [영] Eutychianism [관련] 그리스도단성론

5세기에 발생한 역사상의 설(說.)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들과 동질(同質)이 되는 것을 부정하고, 또한 강생(降生) 이전에는 2개의 성이 있었으나 강생 이후에는 신성(神性)과 인성이 구별이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이 발생하였다. 그 초기의 단성론자들 중에서 주창자(主唱者)는 콘스탄티노플 교외의 수도원장 에우티케스(Eutyches, 375?~454?)였다.

이들의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448년 콘스탄티노플 지방회의에서 드류라이온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단성론적 이단으로 고발당하여, 총대주교 플라비아노(Flavianus)에 의해 파문과 동시에 파면당하였다. 이에 대해 에페소 군도공의회(群盜公議會, 449년)에서는 반대로 그가 정통신앙임이 선언되어 복직했으나,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는 이 파의 총수(總帥) 디오스코로스(Dioskoros)가 파면 추방되고, 에우티케스도 후일에 추방되었다. 현재도 아직 동방에서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야곱파교회가 이 단성설을 주장하고 있다. (⇒) 그리스도단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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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티케스 [라] Eutyches

Eutyches(375?∼454). 콘스탄티노플의 교외수도원장.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이단자.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의 수창자(首唱者)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들과 동질(同質)임을 부정, 또한 강생(降生) 전에는 2성이 있었으나 강생 후에는 신성(神性)과 인성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궁정에 세력을 가지고 네스토리우스파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지방회의(448년)에서는 오히려 드류라이온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단성론적 이단으로 고발당하고, 총대주교 플라비아노에게 파면당하였다. 이에 대해 에페소 군도회의(449년)에서는 거꾸로 그가 정통신앙임이 선언되어 복직했으나,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그 파의 총수 디오스코로가 파면 추방되고, 그 자신도 후에 추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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