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 [영] Santa Claus

세인트 니콜라스(Saint Nicholas)로부터 전화(轉化)된 말. 크리스마스 전날 밤,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고 다니는 붉은 외투 차림에 흰 수염의 노인. 미국에 이주해온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전해져 세계 여러 나라에 대중화되었다. 원래는 4세기 전반에 터키의 남부에 있는 지금의 담브레(Dembre)의 미라(Myra)에 살았던 성 니콜라오(St. Nicholaus) 주교를 지칭한다. 그는 어린이와 선원들의 수호성인이다. 또한 러시아, 자선단체, 동업조합 등 여러 형태의 수호 성인으로 동방 · 서방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성인이나 미라의 주교였으리라는 사실 외에 그의 생애를 밝혀 줄 역사적인 자료는 확실치 않다. 유럽에는 그에게 봉헌된 교회가 수십 개에 달한다. 그의 유해는 1087년 미라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이장되었다. 교회는 12월 6일을 축일로 기념한다. 13세기 수도원학교에서 예전부터 행해져 오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의 관습인 ‘소년 주교 의식'[소년들 중 주교를 뽑아 12월 28일의 축일까지 주교 행세를 하게 함]이 이날로 옮겨졌다.

또한 자선심이 많고 특별히 어린이를 사랑했던 성 니콜라오가 어린이들을 방문하여 선물을 나누어주었다는 전설과 결부하여 축일 전날 밤, 어린이들의 양말 속에 장난감과 과자를 가득 채워주는 풍습이 발전되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미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이러한 옛 가톨릭 관습을 그대로 보존, ‘신비의 사람 방문’이란 관습으로 되살려 12월 5일에서 25일 사이에 실시하여 현재까지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성인과 그 축일의 근본적인 면은 도외시하여 그를 ‘자비로운 요술쟁이’로 대치시켜 ‘산테 클라아스’라 불렀고 이 발음이 영어화되자 어린이들이 더 정답게 부르게 되어 산타클로스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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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한] ∼大聖殿 [이] Santa Maria Maggiore

로마의 4대 바실리카의 하나. 일명 눈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한국식 옛 명칭은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 하였다. 교황 리베리오(Liberius, 재위 : 352-366)가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창건, 교황 식스토 3세(재위 : 432-440)가 재건하였다. 리베리오 교황의 성당 착공에 앞서, 성모마리아는 로마의 한 귀족에 대한 발현(發顯)에서 교황이 성당을 세우려고 원하던 에스퀼리노 언덕에, 한 여름철인데 눈이 내리게 해서 장소를 정해 주셨다는 전설이 있다. 식스토 3세의 재건 때(432년) 이 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되었다. 봉헌축일은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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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동본당 [한] 山亭洞本堂 [관련] 목포본당

⇒ 목포본당

전라북도 여기저기 여러 본당이 설립되었던 1896년 가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호남지방 순회 때 목포에 될 수 있는 한 신자들을 이주시키도록 당시 수류 본당(水流本堂) 라크루(Lacrouts, 具)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한편 1897년 봄 뮈텔 주교로부터 책임을 부여받 드예(Deshayes, 曺) 신부는 목포시 산정동 90번지에 20여 평 규모의 성당 겸 신부사택용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898년 봄에 목포 본당을 설립, 1909년 봄까지 초대 주임신부로서 전교사업을 벌였는데, 당시 교우수는 약 300명이었다.

2대(1909-1912년) 투르뇌(Tourneux, 呂) 신부, 3대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 신부 때인 1913년에는 목포시 산정동 94번지에 현재의 성당을 벽돌조 건물로 100여평 대지 위에 신축하여 성 십자가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4대(1914-1915년) 카넬(Canelle, 簡)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1차 세계대전으로 소집되어 전사함으로써 1년 동안 본당신부 없이 제주읍의 라크루 신부가 대신 관리하였다. 5대(1915-1922년) 타케(Taguet, 嚴) 신부 때는 교우수가 400명, 6대(1922-1932년)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교우수 700명, 7대(1932-1934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 때는 교우수 800명으로 차차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8대(1934-1942년)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신부인 모나간(Monaghan, 矣) 신부 때는 1,800명, 9대(1942년 봄-여름)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 때는 1,950명, 10대(1942년 여름-1944년)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 때는 2,050명, 11대(1944-1949년)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때는 2,500명, 12대(1949. 2-1949년 가을) 김재석 신부 재부임 때는 2,600명, 13대(1949년 가을-1950. 7. 24) 쿠삭(Cusack, 高) 신부 때는 2,750명이었다. 그런데 쿠삭 신부는 6.25 동란으로 인하여 캐롤(Caroll, 安) 몬시뇰, 보좌신부인 오브라이언(Obrien, 吳)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에는 목포 본당이 경동 본당(京洞本堂)을 분리시키면서 산정동 본당으로 이름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쿠삭 신부의 뒤를 이어 모란(Moran, 安) 신부가 14대(1950-1953년)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 교우수는 3,000명이었다. 그 뒤 15대(1953-1953. 6) 도슨(Dawson, 孫) 신부, 16대(1953. 6-1956년) 새비지(Savage, 元) 신부 때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성심유치원을 창립, 운영하였다. 17대(1956-1960년) Dunne(都) 신부 때인 1958년에는 목포시 북교동 본당(北橋洞本堂)의 신설로 본당 관할구역이 분리되었다. 18대(1960-1962년) 휴스(Hughes, 柳) 신부 때는 교우수가 4,594명, 19대(1962-1964년) 모리시(Morrisey, 矣) 신부 때는 교우수가 4,650명이었다. 20대(1964-1969년) 브라질(Brazil, 陳) 신부 때인 1966년 5월 29일에는 목포시 산정동 97번지에 166평의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 슬레이트 성당, 45평의 사제관을 건립하고 성 미카엘 대천사를 본당주보로 정하고 성 미카엘 성당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1969년 9월 3일에는 목포시 연동 본당의 신설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1대 캐얼란(Carelan, 車) 신부 때는 교우수가 3,000명이었고, 목포시 대성동 본당의 신설로 다시 본당 및 공소 관할구역을 재조정하였다. 22대(1972-1974년) 모리시 신부 때는 교우수 2,000명, 23대(1974-1978년) 놀란(Nolan, 盧) 신부 때도 2,000명, 24대(1978-1983년) 이재흥(李載興, 힐라리오) 신부 때도 2,000명이었다. 1978년 10월 27일에는 6.25때 피랍된 성직자(캐롤 몬시뇰,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순교비를 본당 내 성모상 옆에 세워 제막하였다. 25대(1983-현재) 주임신부는 박영웅(朴英雄, 가브리엘) 신부이다. 1984년 현재 신자수는 1,937명이고, 3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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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한] 産業化 [영] industrialization [독] Industrialisierung

오늘날 산업화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현대 산업이 그 경제적 사회적 여건과 환경이 동시에 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지난 30여년간 꾸준히 발전하여 온 산업을 보다 명료하게 구별짓기 위하여 쓰이는 말이 ‘산업화’이며, 최신형의 제조 산업을 주요 역할로 삼는 사회의 성장을 ‘산업화한 사회’라고 부른다. 또한 제조업을 주요 역할로 하기 위하여 발전소나 공장건물 같은 곳에 고정자본을 투자하거나 중장비를 설치하고, 산업기술에 과학을 응용하며 대규모이면서 일정한 규격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 내는 사회가 ‘산업화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산업화라는 말은 현재 산업혁명과정에 있는 지역의 사회와 산업화가 시작은 되었으나 이 지역의 경제생활은 아직 완전히 변형되지 않은 채 있는 그런 사회들과 구별하여 쓰여지기도 한다.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그밖의 각 분야에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일으키게 하며, 국가 규모의 생활에 어느 정도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데에는 그 국가의 도시들의 성장도(成長度)와 성장의 특성을 봄으로써 결정되어진다. 그러나 ‘산업화’라는 용어는 그 모체가 되는 산업혁명이란 것보다는 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주장에 대한 비판 이후에 와서는 산업혁명이란 고작 “어떤 모양의 기술 혁신을 배경으로 하여, 생산의 진행속도가 빨라지는 시기” 정도의 의미밖에는 내포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산업혁명이란 말은 차차 내용이 공허한 것으로 남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경제 성장 이론이나 후진국개발 이론의 전개와 발맞춰, 전에 산업혁명이 뜻하고 있던 한 측면으로서의 ‘농업지배적인 경제로부터 공업화로 가는 과정’을 강조하여 이를 ‘공업화’ 내지는 ‘테이크오프'(takeoff)라고 부르는 경향도 눈에 뛴다. 이 경우 산업화라는 말은 공업화라는 말로 대신 쓰여지기도 한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증기기관의 사용은 산업화를 재촉하는 지역의 특색으로 나타났다. 협의의 산업화는 제조산업의 성장도만 가지고 규정짓는 경우를 말하며, 따라서 이것은 경제발전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견해이며, 앞서 지적한 ‘공업화’와 동격으로 쓰이는 산업화라는 말도 아주 협의적인 사용법임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상 열거한 산업화의 여러 개념들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소개·전파·확대 또는 그 연장선 위에서 조성된 것이며, 그 개념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산업화는 농경사회나 수공업사회에서 농경의 기계화 및 수공업의 기계화와 다량 생산화에의 과정의 성장도로써 산업화 과정을 측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인 개념으로서는 현대 산업의 경제 · 사회적인 여건과 그 도시 · 농촌에 걸친 경제 · 사회적인 환경이 동시에 성장해 가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산업화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숙련도의 지속적인 향상과, 전문화된 기능에 주목하여 이에 비례하여 자본과 노동의 거대한 집중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는 전통적인 사회규범이나 패턴을 파괴 또는 수정해 나가면서 조직적인 생산이 수요에 맞도록 온전한 사회조직을 조절해 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경제적 효율의 집중은, 결국에 가서는 생산능력의 과대팽창을 주도하게 되고, 사회가 주로 경제적 성공만 바라는 경향이 있어 그런 경향에 생산을 맞춰 가기 때문에, 현대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국민은, 증대하는 비인격적인 조직의 지속에 묵묵히 헌신하고 있는 동안에 조절 생산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사회화’라는 말속에는 성장을 위한 집중화와 더불어 성장에 알맞은 조절이 뒤따르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더구나 사회정의의 입장에 각 사람에게 적합하고 넉넉한 일터의 제공과, 적절한 기술 습득의 가능성의 제공, 특히 질병과 연령관계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생계와 인간의 품위를 안전하게 보장해 주고, 경제 및 산업화라는 것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라야만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1967. 3. 26. 교황 바오로 6세 회칙).

[참고문헌] W. Ashworth, A Short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Economy, 1850-1950, London 1952 /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Europe, Cambridge Univ. Press, v. 2, 1952 / Proceses and Problems of Industrialization in underdeveloped Countries, United Nations, New York 1955 / R.J.D. Braibanti and J.J. Spengler, eds, Traditions, Values, and Socio-Economic Development, Duham, N.C. 1961 / B.F. Hoseltz and W.E. Moore, eds, Industrialization and Society, Paris 1963 / J.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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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문제연구소 [한] 産業問題硏究所 [영] Institute for Labor and Management

현대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노동문제, 즉 노동자의 소외와 빈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각종 산업재해 등을 조사 · 연구 · 교육함으로써 공동선(共同善)이 구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1966년 6월 서강대학교에서 설립한 연구·교육기관·주요 활동은 산업·노동관계 각종 자료조사, 조사결과의 출판, 노동조합지도자 및 사용자들의 교육 등이 있다. 그 중 노동조합지도자와 사용자에 대한 교육이 중점사업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소는 180시간의 정기 야간과정과 지방노동조합 지도자 교육과정 등 2개의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교육내용은 연설, 회의진행법, 노동법, 노동조합의 조직과 운영, 국제노동운동, 노동경제, 회계학, 공산주의비판,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사회원리, 경영인의 사회적 책임, 사회 지도자론, 협동조합론, 신용조합론, 사회보장론 등이다. 서강대학교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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