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카법전 [한] ∼法典 [라] Lex Salica [영] Salic Law

살리카 법전이란 살리계(Salicans) 프랑코족의 클로비스(Clovis, 466-511) 왕이 편찬한 법전으로, 이 법전이 여자의 토지상속과 왕위계승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부정하는 법전을 모두 살리카 법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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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수도회 [한] ∼修道會 [라] Societas Sancti Francisci Salesii

185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보스코(Don Giovanni Bosco, 1815-1888)가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보호성인으로 해서 창립, 1869년 일시적으로, 1874년에는 결정적으로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인가되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 남자, 특히 빈곤하고 불행한 남자 청소년을 위해서 그리스도교적 자선사업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년의 집을 설치해서 소년들이 가두(街頭)의 위험에서 떨어져서 자유롭게 오락과 정신수양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또한 도제(徒弟)의 집, 학생의 집, 청소년단체, 기숙학교, 신학교, 직업학교, 고아원 등을 경영하고 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또 본당사목(司牧), 이민사목 및 회의포교에도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창립자 보스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등에 57개 본부와 1,039명의 회원이 있었다. 보스코는 1929년 시복(諡福), 1939년 시성(諡聖)되었다. 이 수도회는 보스코의 후계자들, 무아(M. Rua, 1888-1910, 알베라(P. Albera, ?-1921), 리날디(P. Rinaldi, ?-1931), 리칼도네(P. Ricaldone, ?-1951) 및 치조티(R. Ziggiotti)에 의해 급속한 발전을 거듭해서 현재 86개국에 1만 7,620명의 회원이 활약하고 있다. 현재 본부는 로마에 있다.

1. 한국진출 : 1953년 당시 광주교구장 서리 해롤드 현(Henry) 신부가 일본(日本)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장 타시나리 신부가 제의한 동회의 광주에서의 청소년 교육사업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회원은 일본관구에서 일하던 아르키메데(Martell, 馬)신부였다. 그는 1954년 5월에 입국, 광주시 중흥동 371번지에 대지 2만 5,000여평을 매입, 한국땅에 최초로 살레시오 교육사업 터전을 만들었다. 그 후 1955년 9월까지 4명의 회원이 더 내한, 도합 5명으로 일본관구 소속 광주수도원이 이루어지고 초대 원장에 마르텔리 신부가 취임, 이듬해에는 수도원 경내에 살레시오 중학교 본관(816평)을 건축,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1958년 6월 서울에 진출, 도림동 본당을 사목, 1959년 4월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가 인가되고, 1963년 2월 최초의 한국인 회원 탄생, 3월 서울 구로동 본당을 사목, 1972년 3월 돈 보스코 직업훈련소가 준공되었다. 그해 6월 한국 살레시오 수도회는 일본관구소속에서 벗어나 로마총장 직속인 한국 살레시오 지부로 인준을 받아 준 자치적인 행정을 하게 되었고, 초대 지부장에 마리오(Ruzzedda Mario) 신부가 취임하였다. 1974년 청소년 생활관과 피정의 집을 개설, 1979년에는 서울강서구 신월동에 수용인원 120명의 살레시오회관(피정의 집)을 건립, 연평균 1만명의 서울근교 중고등학생과 각 본당 청소년들이 이용하고 있다. 1979년부터는 신도림동(대림동) 수도원에 미감아(未感兒)등 불우청소년을 위한 기숙사를 개설, 80여명을 수용하고 목공과, 농과를 두어 기술습득을 시키고 있다. 1980년 5월부터는 이 기숙사에 영보수녀원 수녀 4명이 파견되어 침식을 돌보고 있다.

2. 현황 : 이 수도회는 서울에 4개 지역공동체와 전남 광주시에 1개 지역공동체 등 도합 5개 지역공동체가 활약하고 있다.

① 살레시오 수도원 :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929의 1에 위치, 대지 2,748평, 연건평 540여평에 한국지부사무소, 수도원 수련소 및 지원소, 그리고 노동청소년 기숙사와 목공 훈련소, 농과를 운영하고 있다. 기숙사의 노동청소년 중 58명은 외부직장을 가지고 있고 목공훈련소에 12명과 농과에 5명이 일하고 있다.

② 돈 보스코 청소년 센터 : 살레시오 수도회 공동체 중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부 2명, 수사 4명, 회원 6명이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위치는 영등포구 신길동 4491번지, 대지 1만 922평, 건물은 야간중학 교사, 직업훈련소, 기숙사 등 총 6동에 건평 1,242평의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③ 구로 3동 본당 : 서울 구로구 구로동 265의 1에 1,208평, 연건평 643평에서 회원 3명, 성체인보회 수녀 4명이 본당을 사목하고 있다. 입지조건이 공단지역이어서 관내의 가난한 노동청소년들을 위해 평일에도 퇴근후 성당에 와서 공부와 종교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

④ 살레시오 회관 : 서울 강서구 신월동 산 36의 2 및 3에 대지 4,225평, 건평 506평의 철근콘크리트로 3층으로 된 피정의 집은 120명 수용시설이다.

⑤ 화곡동 기숙사 : 강서구 화곡동 105의 51에 74평 대지에 건평 57평의 기숙사 건물에서 1976년부터 미감아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시작했으나 1979년 12월 대림동에 위치한 살레시오 수도원내 노동청소년 기숙사로 옮기고, 이후 테제 공동체가 임시로 사용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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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수녀회 [한] ∼修女會 [영] Salesian Sisters

① 창립 : 정식명칭은 Daughters of Mary Help of Christians이다. 1872년 이탈리아의 신부 성 보스코(Giovanni Bosco)와 성녀 마자렐로(Maria Dominica Mazzarell)가 함께 이탈리아의 모르네제(Mornese)에서 창립한 세계 최대의 여성 종교단체. 공동 창립자 보스코는 “청소년 교육 여하가 장래 사회의 건전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믿고 청소년을 위한 살레시오

대가족(살레시오 수도회, 살레시오 수녀회, 살레시오 협력자회)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중 이 수녀회창립은 마자렐로를 비롯한 11명의 서원자가 그가 작성한 회헌 아래 이루어졌다. 이 회의 기본정신은 보스코와 마자렐로의 영성을 본받아, 성체, 도움이신 마리아, 그리고 교황께 대한 3대 신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내게 영혼들을 주시오. 그 밖에는 모두 가져가시오”라는 모토 아래 특히 불우한 여성교육에 힘쓰고 있다.

② 한국진출 : 살레시오 수녀회는 1957년 4월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초청으로 솔라리(Carmela Solari) 수녀 등 5명이 서울 도림동(道林洞) 본당에 부임함으로써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한편 이보다 앞서 1954년 광주 교구장 서리 헨리(Harold Henry, 玄) 신부는 마르텔리(Archimede Martelli) 신부를 비롯한 살레시오 수도회원을 광주에 초청, 2년 후인 1956년 살레시오 중학교를 개교한 바 있었는데, 운영난 때문에 광주교구가 기증받은 학교의 운영을 맡아줄 것을 일본관구장(日本管區長)에게 제의, 이것이 받아들여져 1958년 4월 살레시오 수녀회가 광주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족된 광주분원(光州分院)은, 학교, 주일학교가 교리를 통한 여성교육, 그리스도교인 양성 등을 목적으로 설립하고, 1961년에는 살레시오 여자중학교가 설립을 보게 되었으며 1963년에는 초등학교도 설립되었다.

한편 1960년 한국 대표자 솔라리 수녀는 여학교 설립을 장려하는 노기남 주교의 알선으로 서울 도림동본당에 이웃한 신길동 야산 40,000㎡를 매입하고 미군의 도움으로 터를 닦아 1962년에 여학교 건물을 기공, 1964년 3층 9개교실의 교사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안젤라 베스파(Angela Vespa) 총장수녀는 성소자가 많은 사실을 기뻐하며 이 건물을 지원소로 사용목적을 변경케 했다. 초대 원장 카바르잔(Anna Maria Cavarzan) 수녀 등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1968년까지 6회나 청원자들을 길러 이탈리아에 있는 수련소로 파견하였다. 1968년 도림동 분원이 폐쇄되면서 이 지원소는 ‘도움이신 마리아’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1969년 수녀회 본부가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로마로 옮겨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지침에 따라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새로이 선출된 총장 칸타(Ersilia Canta) 수녀를 선두로 한 쇄신된 활력은 한국에도 미쳐, 살레시오 수녀회는 성장기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976년에는 일본관구 관할에서 독립하여 총장 직속의 한국 위임구(委任區)로 승격, 초대 위임구장에 무어(Caterina Moore) 수녀가 임명되었고, 서울지원소가 본원으로 성장하였다. 성소자 양성면에서는 1970년 제 9회 청원자를 이탈리아 수련소로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1972년 본원에 수련소가 신설되어 국내에서 수련할 수 있게 되었고, 1980년 이 수련소가 광주로 이전되면서 성 요셉 분원으로 발족하였다.

서울에는 창립자들의 정신에 따라 불우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1971년 마자렐로 센터를 설립, 시골에서 올라와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무의탁 여공들을 기숙시키는 이 시설은 1976년에는 120명 수용의 시설로 증축되었다. 1979년에는 마산(馬山)에도 근로여성기숙시설인 아욱실리움 센터가 설립되었다. 현재 살레시오 수녀회 한국위임구 사무소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 5동 253의 245(전화 832-2654)에 있고, 회원수는 총 92명(지원자 20명, 청원자 7명, 수련자 9명, 유기서원자 14명, 종신서원자 4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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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 [라] Salesius, Franciscus

Salesius, Franciscus(1567-1622). 살(Sales)의 프란치스코라고도 한다. 성인. 축일은 1월 24일. 제네바의 주교. 교회학자. 이탈리아 귀족 출신으로 안네시(Annecy), 파리 및 파두아(Padua)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1593년 사제 서품되었다. 칼빈주의로 개종한 샤블레(Chablais)에 첫 부임하여 4년간의 사랑의 설교를 실시, 대부분의 주민을 가톨릭으로 복귀하게 하였다. 1602년 제네바의 주교가 된 뒤 교구 개혁과 재조직에 전념하였고 16510년 과부 샹탈(St. Jeanne de Chantal)과 함께 성모방문 수도회를 창설하고 리용의 한 방문 수도회에서 일생을 마쳤다. ≪신심 생활의 입문≫(Introduction a la vie devote, 初版 1609)과 ≪신애론≫(神愛論, Trait de l’amour de Dieu, 初版 1616)을 저술하였는데, 후자는 인간의 삶 속에 있는 신에 대한 사랑을 다룬 가벼운 논문으로 그의 가장 뛰어난 저서이다. 또한 과학, 예술 및 프랑스어에 대한 관심으로 프랑스 아카데미(Academie Francaise)가 세워지기 이미 30년 전에 안네시에 아카데미(Academie Florimontane)를 세웠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언론인과 저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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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여지전도 [한] 山海與地全圖

중국 선교사인 예수회 소속 리치(Matteo Ricci, 利瑪寶)가 제작한 동양최초의 근대 세계지도라고 알려져 있다. 산해여지전도는 조경판(肇慶版, 1584), 조심당판(趙心堂版, 1584-1599), 남경판(南京版, 1600), 귀주판(貴州版, 1604)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조경판과 남경판은 리치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며, 나머지 둘은 방각본(倣刻本)으로 각각 조가회(趙可懷), 곽자장(郭子章)에 의해 간행되었다고 전한다. 지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지도의 내용과 규모 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다음 몇가지의 문헌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즉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1602) 오좌해(吳左海)의 서문, 풍응경(馮應京)저 재임증(載任增)역 ≪월령광의≫(月令廣義, 1602),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之峰類設), 알레니(J. Aleni, 艾儒略)의 ≪이마두선생행적≫(利瑪竇先生行蹟), 리치의 ≪입연기록≫(入燕記錄), 바들리(J.F. Baddeley)의 <마테오 리치의 중국지도>(Father Matteo Ricci’s Chinese World-Map, Gegraphical Journal, Oct. 1917)등이 <산해여지전도>의 자료를 담고 있다. 이들 문헌에 의하면 리치는 1583년 광동성 조경(肇慶)에 도착하여 중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선교의 한 방법으로 서양식 세계지도를 번역하였다 한다. 최초의 판인 조경판은 조경총독 왕반(王伴)의 요청으로 오르텔리우스(A. Ortelius)의 세계지도≪Treartum Orbis Terrarum≫(1570)를 한자로 번역, 표기했다고 한다. 다만 대형의 한자를 넣기 위해 도폭(圖幅)을 원도(原圖)보다 확대하였다. 지도는 중국인 학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이로써 리치는 남경과 북경에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경판은 리치가 중국에 도착한 지 2년만에 제작되어 한문번역에 미숙함이 많았고 따라서 리치 자신도 오류가 많았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던 중 남경 오좌해(吳左海)의 도움으로 남경판을 제작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金良善, 明末淸初 耶蘇會宣敎師 製作한 世界地圖,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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