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효론 [한] 事效論 [라] ex opere operato

성사(聖事)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행위인 성사적 예절에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이론. 이는 성사의 유효성이 성사 집전자의 성덕(聖德)이나 의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지에 관한 문제이며, 영향을 받는다고 긍정하는 인효론(人效論)에 대립하여 주장되었다.

역사상 이 문제가 처음으로 야기된 것은 256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주교였던 치프리아노와 당시의 로마 교황 스테파노와의 대립이다. 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이단자들로부터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아 그 세례자가 정통교회에 귀의할 때는 재세례를 베풀었으나, 로마 교회에서는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이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성삼(聖三)의 이름으로 베푼 성사는 유효하다고 하였다. 아프리카 교회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멸망(5세기 초)되어 그 전통이 중단되었고 로마 교회의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후 312년에 같은 문제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교회에서 도나투스 열교 사건을 통하여 재발되었다. 체칠리아노의 카르타고 주교 서품식을 공동집전한 3명의 주교 가운데 과거에 배교한 적이 있는 펠릭스 주교가 끼어 있었는데, 체칠리아노를 반대하던 엄격주의자들은 그의 서품을 무효라 하면서 도나투스를 주교로 선출하여 이에 대립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통교회는 체칠리아노의 주교 서품을 유효하다고 인정함으로써 성사의 유효성은 집전자의 성덕과 무관함을 보여 주었다. 8세기 이래 성직자들의 생활이 불성실해지자 마침내 프랑스의 알비인과 스위스의 보인 등은 정화운동을 벌이면서 타락한 성직자가 집전한 성사는 은총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 1198-1216)는 독성 행위와 성사집전 행위를 구별지으면서 행위자(opus operans)의 행실이 깨끗하지 못할지라도 이행된 행위(opus operatum, 즉 그 자에 의하여 이행된 성사적 행위)는 깨끗하다(De Sacro Altaris Mysterio 3, 6)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구별방법은 13세기 중엽 모세의 예식과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서로 구별하여 설명하는데 응용되었다. 즉 모세의 예식은 수령자의 신앙 정도에 따라 인효적으로(ex opere operantis) 은총을 주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성사는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수령자에게 은총을 준다고 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사의 효력이 집전자의 성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트리엔트공의회는 성화의 사효성(事效性)을 재천명하였다(Denz. 1608).

사효론에 의하면 성사의 예절은 집전자의 의도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정해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객관적 의도가 성사 집전자를 강요하며 성사의 효력을 나타낸다. 즉 교회가 정해 둔 객관적인 절차와 사물이 구원의 은총을 실제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집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사의 표징을 통하여 전달하고자하는 은총이 전달되도록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회의 예식을 집행하는 일이다.

성사의 유효성에 관한 한 사효론이 성사 신학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사효론은 성사 집전자의 개별적인 참여보다 교회의 객관적 조직을 더 중요시한다. 성직자는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선물을 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봉사 직무를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성직자의 의도를 초월한다. 즉 성사를 이루는 것은 교회 공동체이고 성직자는 중개역할만 한다. 이처럼 사효론은 성직자의 존재가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제 영성(靈性)과도 부합한다. 또 사목상으로도 사효론은 신자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 성사의 효력이 성직자의 성덕이나 의도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신자들은 성사받기 전에 성직자의 사상과 사생활을 미리 알아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수령한 성사의 효력도 의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는 성사의 효과면에서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와 성사 수령자가 지니는 신앙의 역할에 대하여 상호 이해를 깊이 하게 되었다. 성사의 사효성을 인정한 트리엔트공의회는 성사가 성사 수령자의 신앙을 증진시키는 점이나 성사 수령자의 신앙이 성사 은총을 받는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함을 부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공의회 교부들은 의화(義化)가 성령의 작용 정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지향 및 협력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명언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P.L. Hanley, Ex opere operato,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5, McGraw Hill, 1967 / 金慶恒, 聖事의 有效性, 神學展望, 36호,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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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환경 [한] 社會環境 [영] social environment [독] Sozialumgebung

일반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와 일정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어 그것에 영향을 주며 제약하고 있는, 주위의 자연적 및 사회적 또는 문화적인 사정이나 상태를 통틀어 ‘환경’이라고 한다. 환경이 인간 또는 다른 생물의 생활 및 발전을 규정하는 자연 · 사회 · 문화 등의 외적인 조건의 총체라고 보았을 때, 특히 ‘사회환경’은 자연환경이나 문화환경 등을 수렴하여 인간 대(對) 환경의 문제를 사회적 철학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환경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환경은 물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신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변화하고 있는 상호관계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의미가 있다. 뒤르켐(Emile Durkheim)은 사회적 집합체를 그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개인이 느끼고 행동하는 ‘환경’ 또는 장(場, field)으로서 생각하였다. 사회환경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며, 사회적 집합체에 있어서 성원들의 패턴을 이룬 상호행위에 의하여 유지된다. 이리하여 그는 사회환경이 우선 집합표상(representation)과 그 자신의 규범과 가치를 갖는 제도, 그리고 합리적인 활동의 조직적인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 표상, 규범, 가치는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사회환경은 행위의 방법과 수단의 선택에 영향을 줌으로써 사회환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침투한다. 뒤르켐의 사회환경에 대한 개념은, 사회 실재론과 사회명목론의 유효한 측면을 그리고 암시적으로는 사회적인 인간주의의 유효한 측면을 결합시켜 사회학(社會學, sociologie)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가톨릭의 입장은 환경 문제에 대하여 광범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 즉 사회환경에 관련하여 사생활의 고독과 인권에 대한 것, 도시화와 농촌사정 등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공업화되는 사회 안에서 도시화현상은 생활양식과 공업화되는 사회 안에서 도시화현상은 생활양식과 관습적 존재 구조를 뒤집어엎는다. 이리하여 인간은 새로운 고독을 느낀다. 이 고독에 대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서한 <행동에의 부름>(1971. 5. 14)에서는 “몇 세기를 두고 정복하려고 노력한 자연 때문이 아니고 무명의 대중 속에서 스스로 낯선 사람으로 소외당하는 고독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도시의 인구증가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농촌인구의 도시이동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고, 때로는 거대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서,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를 빚어내고 있다.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1961. 5. 15)에서는 이론적으로 농촌생활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이어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사람과 가족에 대한 인간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관념을 갖는다면, 우리는 인간사회의 모습을 가지고 작용하는 기업체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가 없으며 그 종업원간의 관계와 그 구조는 정의의 규범과 위에 말한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라야 하며 무엇보다도 가족적인 규모의 기업이 가장 좋은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상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환경이 허락하는 데까지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최대의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사회 안의 화해와 인권은 개개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구체화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도록 요구하며, 따라서 각 개인과 집단은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 의한 체포, 고문 및 구금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하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적 · 사회적 · 문화적 · 정치적인 권리에 대한 사법상의 보호를 보장받아야 한다. 비인간적인 생활조건의 희생물이 되어 서민들의 양심이 어두워지고 가족제도마저 해를 받게 되는 도시화현상에서 빚어지는 부산물을 우리는 현재의 환경파괴의 문제상황 속에서 갑자기 의식하게 되었다. 인간은 공해(公害)문제 같은 자연의 오염과 폐물, 새로운 질병과 ‘전면적인 파괴력’같은 물질적 환경의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감당할 수도 없는 내일의 생활조건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환경의 조성 문제야말로 현대의 환경이론이 안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참고문헌] Ch. P rin, De la richesse dans les soci t s chr tiennes, 2권, 3판, 1881(독일어역 1876) / Emil Durkheim, The Rules of Sociological Method, Chicago, 1938; Suicide, New York 1951 / Theodore Abel, The Foundation of Sociological Theory, 1970(張晙昊 社會學理論의 基礎, 三英社, 1982) / 社會正義, 가톨릭出版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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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 [한] 社會化 [영] socialization [독] Sozialisierung

인간 사회의 상호 작용이나 영향의 과정을 사회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늘 어떤 집단사회의 성원이며 또 현대의 산업사회의 성원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가기 때문에 항상 동일화(同一化)해야 살아갈 수 있는 필연적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일어나는 동일화 현상을 사회화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위에 든 두 가지 경우 말고도 사회화라는 용어는 광범하게 국가 또는 공적인 기관에 의한 산업의 통제 · 관리 · 소유를 가리킬 때도 쓰이며, 나아가 사회주의화(社會主義化)를 뜻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게 된다.

이 용어는 교황 요한(Joannes) 23세의 회칙(回勅) 2부에 처음 나타나며, 그 시초는 ‘rationum incrementa socialium’이라는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어역 회칙에서는 각기 socializaione, socialisation, socialization으로 사용되었다. 사회화라는 용어가 흔히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잘못 생각되어져 두 용어를 같은 개념으로써 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요한 23세가 썼던 사회화라는 말의 의미는 집단활동, 공동생활, 사회단체 또는 그밖의 조직체 등의 활동을 통하여 부유층의 숫자를 많이 발전시켜 나감을 뜻했으며, 현대의 생활을 특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회적인 협동을 향상시켜 나가기를 바라는 경우에 사회화라는 말을 썼다.

사회화의 과정은 근본에 있어서 인간의 근원적인 사회적 소질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인격의 독립적인 존재, 독자성, 독자적인 가지와는 관계없이 동료 인간과의 공동사회 속에서 생활하며, 그 생명적인 자신의 과제를 다해 가야만 하는 운명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생활이 인간과 인간의 상호의존적인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상태에 대한 자발적인 인간의 응답이라는 점에서 사회화의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교황 비오 6세의 회칙에 보면 이 사회화라는 말은 정치적인 국가와 개인적인 시민 사이의 중간에 끼어서 자주적이고 조직적인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되는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조직사회 속에서 한결 두드러지게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리하여 요한 23세의 회칙에서는 사회화라는 용어가 협의적이거나 순 이론적인 해석을 떠나 있지만 비오 6세의 회칙이 말하고 있듯이 그러한 사회의 본질을 부여하고 있는 의미의 사회화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요한 23세의 회칙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회화의 과정은 누구나 생활을 부유하게 하고 누구나 능력껏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개인적인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회집단이 자치권을 좋아하듯이, 그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인적인 관여를 함으로써 개인적 주도권을 숨막히게 하기 쉬운데, 이런 경우 위기가 닥치게 마련이다.

사회화와 사회주의(socialism)의 서로 다른 점은, ①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어떤 투로 어떤 경우에 쓰이든지 간에 정치적인 지배로 집약됨을 뜻하나, 사회화라는 말은 요한 23세가 분명히 밝혔듯이 정치적인 지배나 권세의 무소속자를 뜻함이 결코 아니라, 다만 사회집단의 성장 발전을 바란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며, ② 사회주의가 공적 또는 국가적인 산업소유권의 중요한 총량(總量)을 포함하고 있음에 반하여 사회화는 그렇지가 않고, ③ 사회주의는 국가경제를 위한 중요계획을 갖고 있지만, 사회화는 이왕 대조적으로 보다 저소득수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창의력을 촉진시켜 준다. 그런데 공적 또는 국가기관에 의한 산업의 통제 · 관리 · 소유를 말할 경우, ‘사회주의화’의 뜻으로 ‘사회화’라는 용어를 쓸 때가 있는데, 이것은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토대로 하고 있는 사회체제 및 그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 운동 즉 사회주의, 이를테면 비(非)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 = 공산주의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렇지만 생산수단의 사유(私有)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회화’와 ‘사회주의화’는 엄격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참고문헌]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1963 / 사목헌장,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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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한] 社會學 [영] socilology [독] Soziologie [프] sociologie [관련] 사회

인간의 사회생활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19세기초에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사회학이란 용어는 콩트(A. Comte)가 그의 주저 ≪실증철학≫(Cours de Plilosophie Positive, 1830-1842)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콩트에 의해 처음 시작된 초기 사회학은 생물학적 비교론에 의거하여 종합사회학을 지향했지만 그후 1890년대부터는 심리학적 방법론으로 사회학의 연구영역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유력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짐멜(Georg Simmel)의 형식사회학(形式社會學, formale Soziologie)이다. 그러나 형식사회학은 사회학이 정치학 · 경제학 · 인류학 · 역사학 · 심리학 등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연구영역을 확보한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내용없이 공허하게 개념만 늘어놓는 말장난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학은 사회의 본질,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연구내용으로 정착시켰다.

초기 단계의 사회학은 사회에 대한 논쟁으로 일과, 구체적인 연구실적은 미미하였다. 그 한편의 주장은 사회에 우선하여 개인이 있다고 하는 사회명목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보다 사회에 더 많은 비중을 두 사회실재론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학은 이 두 입장 중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실재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의 내용은 퍼스널리티, 집단, 문화의 3가지 부문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사회학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분석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 사회적 행동양식의 연구가 퍼스널리티 형성이론이고 여기서 다시 계급적 성격과 민족적 성격을 추구하는 사회성격론으로 나아간다. 둘째로 사회학은 인간의 사회생활, 즉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생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집단에 대해 유형별로 분석하고 집단 사이의 상호연관을 밝혀낸다. 특히 인간생활을 조직화하고 관료제화 하는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사회상황이 몰고 오는 문제점이 사회학의 중요한 연구내용이 된다. 셋째로 사회학은 사회의 문화적 측면을 연구한다. 사회의 산물로서 문화는 물질문화 · 정신문화 · 제도적 문화 등 여러 분야로 나누어지며 이들 문화는 산업화, 도시화가 진전되는 중에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추구한다.

사회학은 이상과 같은 내용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려 한다. 특히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사회조사법의 발전에 실증 ‘철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실증 ‘과학’으로 정착시켰다. 현대의 사회학은 20세기초 이후 심리학적 방법을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도입하였고, 문화인류학과도 교류하면서 그 내부에 도시사회학 · 농촌사회학 · 산업사회학 · 교육사회학 · 정치사회학 · 종교사회학 · 지식사회학 등으로 분화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관심은 각국에서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오랫동안 부르즈와 학문이라 하여 사회학을 거부해 왔던 소련에서도 사회학의 연구에 대해 공인하기에 이른 상황이다. (⇒) 사회

[참고문헌] K nig, Soziologie heute, 1949/Frank, Sociology of Development and Underdevelopment of Sociology, 1969 / 권태환 외, 사회학개론, 1981 / 이장현 외, 사회학의 이해, 1982 / J. 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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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한] 社會主義 [영] socialism [독] Sozialismus

사회주의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소외되고 빈부의 차가 격심해짐에 따라 노동자의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해방을 주장하는 사상을 말한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먼저 오웬(R. Owen), 생 시몬(Saint Simon), 푸리에(J.B.J. Fourier)등에 의해서 사유재산의 철폐와 재산의 공유가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 사상들은 마르크스(K. Marx)에 의해서 공상적 사회주의로 규정되어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주의와 구별된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넓은 의미로 보면 마르크스 이전과 이후의 모든 사회주의적 사상을 포괄하나 좁은 의미로 보면 마르크스와 레닌(V.I. Lenin)에 의해서 발전된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톨릭 교회는 어떠한 정치사항을 배격하거나 찬양하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으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비오 11세가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회칙>(Divini Redemptoris, 1937)에 서 그 비인도적 성격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그 후에도 많은 문헌을 통해서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혁명의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과거에 가톨릭 교회가 추한 태도는 이론적 입장에서는 무신론 및 종교에 대한 공격이나 박해를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신학이 가톨릭 신학에 대해서 중대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신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를 중심으로 하는 문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또 세계를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이해해야 함을 요구하고, 성서 가운데 내포된 미래지향성을 재발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양자간의 이론적인 차이나 대립을 보다 엄밀하게 이해하고 규정하는 동시에, 실천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한 협력해 가려고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종교비판은 모든 사회 비판의 제일조건이다. 이 종교비판은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는 종교를 관념론의 최고 형태로서 비판하고 또 하나는 종교를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로서 비판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강자의 약자 압박의 결과이며 수단이라고 말한다. 레닌은 “우리는 종교와 투쟁하여야 한다. 이는 유물론 전반의 입문이며 따라서 마르크시즘의 초보다”라고 말하고 “신이란 자연의 힘과 계급의 속박으로 압박되어 둔해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공상의 총화이며 이런 공상은 계급투쟁의식을 약화시키고 억압시킨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비오 11세는 “현대세계에 있어 가장 무서운 위험은 사회질서를 전복하고 그리스도교 문명의 근본까지도 뒤엎어 버리려는 과격한 무신론적 사회주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회주의는 인간을 한갓 현세의 부분품으로, 물질의 노예로만 격하시키는데 반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를 옹호하고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현세의 올바른 질서를 가르친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영성의 우위, 찰나주위에 대한 영원한 생명의 우위, 상대적 존재들에 대한 절대자의 우위성이다. 사회주의자의 대다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한낱 환상적 투신에 불과하며 근거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는 복음에 비추어 인간경험을 이해하기 때문에 정반대의 견해가 옳다는 것이다.

마르크시즘의 중심에는 인간을 소외로부터 해방하여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화해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혁명의 중개의 관념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중심에는 참으로 특수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그리스도라는 중개자의 성질에서 최고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구원의 중개가 있다. 사회주의는 이성과 하느님의 계시에 반하는 오류에 가득찬 체계이며 사회의 근본을 파괴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인간 인격의 제 권리, 그 존엄, 인격 자체를 무시하는 체계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으로부터 윤리적 행위의 영적 원리인 자유를 박탈한다. 사회주의는 집단에 대한 개인 인격의 본성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에 있어서 인격은 이미 조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적 체제들은 인간의 참된 가치와 초자연적 목적을 무시한다. 사회주의의 교리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고양(高揚)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로 비하시키고 있다. 즉 사회주의는 인류의 마음을 침범하여 그것을 멸망시키는 치명적인 페스트와 같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양심, 인격적인 이성과 자유를 소멸시키는 일은 단연코 용납하지 않으며, 또 계급을 인간의 양심과 이성과 자유에 대치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공동체의 이성을 인정하고 계급의 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민족이나 계급보다는 더욱 깊고 훨씬 더 높은 현실이다. 이 진리는 모든 계급과 모든 이해(利害)와 증오에 대항해서 주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의 근본적 결점은 유물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 안에 있는 정신질서의 고급한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확히 해석하지도 못한다. 많은 이들의 고급경향이 감소되고 물질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하든 간에 그의 정신이 특히 계급관념을 추월할 만큼 관대하며 이해성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졍제학비판 서문에서 “인간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들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은 특정의 필연적 관계 즉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관계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단계에 대응한 것이다. 이들 생산관계의 총체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실존적 기초가 되어 그 기초 위에 알맞게 특정된 사회적 의식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질적 경제생활의 생산방법은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생산과정을 제약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 세상에서 생산방법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발전이 생산방법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경제적 변화는 계급투쟁과 혁명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현존 경제체제로 인하여 혜택을 받는 계급의 저항과 이 체제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는 계급의 압력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다. 요약하면 유물사관은 상당히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였고 이에 대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충분한 설명을 하였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유물사관이 보편적 진리가 되기 위하여는 중요한 모든 역사적 사건의 근본 원인도 설명하여야 한다. 즉 다만 경제조건만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주어야 하며, 경제적 인자만이 역사적 변천에 간섭하여야 하며, 계급투쟁과 혁명이 세계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는 이러한 여러 명제를 설명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에 있어서 다른 요인들이 역사에 작용하여 또 역사의 흐름은 숙명에 맡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계급을 물질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사회의 계층으로 본다. 따라서 계급형성에 있어서는 심리적인 요인이나 다른 요인은 전혀 무시된다. 계급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중요성은 상대적이다. 가령 마르크스가 계급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에 관한 것뿐이고 전체적인 인간에 관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가장 현저하고 가장 비인간적인 허위는 인간을 초월하여 계급을 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곳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정신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계급에 종속되는 한 가지 기능으로 환원해 버리는 일이다. 계급을 유기적 현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나 인격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더 한층 근거가 박약하다. 계급은 사회적 과정의 한 기능이며 이에 따르는 일체의 것을 다만 인격에 종속하는 부분을 이루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정치이론은 계급투쟁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고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즈와지의 투쟁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옮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자와 빈자의 관계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줄기찬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 두 계급은 처음부터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그 때에는 필연적으로 자본가 계급에 대하여 무산자 계급의 투쟁이 벌어진다. 착취자인 자본가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착취를 감수하고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피착취자들의 힘이 증대해지면 현존사회의 균형은 무너지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즉 현존 경제체제에 의존하던 상층구조는 전복되고 새 경제체제에 부응하는 상층구조가 점차로 성립된다. 사람들은 이 혁명의 시기를 지연시키거나 단축시킬 수 있을 뿐 혁명 자체를 저지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계급투쟁을 완화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회주의의 정치이론의 허점은 폭력이라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며, 불가피한 숙명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폭력은 결코 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계급투쟁과 증오와 파괴를 인류의 진보를 위한 십자가로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혁명불가피론 또한 잘못된 이론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진리였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 자본국에서 먼저 일어났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본주의가 가장 부진했던 러시아에서 소수인에 의해서 혁명이 조직되고 추진되었다.

오늘날 개인이나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충만하고도 자유로운 생활에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요구들이 오직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사유재산제도 속에서 인간의 자기 소외의 원인을 발견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교는 소유권의 확인 속에서 또 지상의 부의, 만인에 의한 사용이라는 기본적 권리의 한계 내에서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현실적 자유의 원천을 본다.

사회주의는 그리스도 교인에 있어서 극히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그리스도교인이 자기의 의무를 태만히 하고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실현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를 회심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의는 오늘날까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깊은 섭리에 의해서 악의 힘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 공산주의 (韓庸熙)

[참고문헌] 한용희, 가톨리시즘의 공사주의 비판, 숙명여대정치경제연구소 논문집, 1981 / 비오 11세,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 1937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N. Berjaev, 그리스도교와 계급투쟁, 대한기독교서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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