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ethius, Anicius Manlius Torquatus Severinus(480?-524?). 로마의 철학자. 정치가. 로마 태생 아테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487년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재위:493-526) 밑에 집정관이었으며, 자신도 510년 집정관이 되었다. 교양과 염직(廉直)으로 중망을 모았으나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다년간 투옥된 후 재판도 없이 파비아(Pavia)에서 처형당하였다. 파비아의 옥중에서 저술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은 각 시대, 각국어의 번역서가 출간되어 교양서로서 널리 애독되어 왔다. 그밖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역(全譯)과 후자의 플라톤적인 주석(註釋)을 기획했는데 완성되지 못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관한 부분은 12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학의 거의 유일한 자료였으며, 또한 보편논쟁(普遍論爭)의 실마리가 되었다. 학문을 삼학(三學)또는 사학(四學)으로 분류하는 것은 가페라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가 그것을 지혜로의 길로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보급된 것이다. 이들 저서는 신(新)플라톤적, 스토아적이며, 특히 신앙에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인격신관(人格神觀) 또는 상기설(想起設)의 아우구스티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신학서로는 ≪삼위일체론≫(De Sancta Trinitate), 칼체돈의 그리스도론을 옹호한 ≪에우티케스파 및 네스토리우스파 반박론≫(Liber Contra Eutychen et Nestorium), ≪선함과 올바름≫(De Hebdomadibus) 등이 중요하다.
보스코 [원] Bosco, Don Giovanni
Bosco, Don Giovanni(1815-1888). 성인. 사제. 사회사업가. 축일은 1월 31일. 1841년 신부로 서품된 뒤 부랑아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 1846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여 토리노 근교의 발도코(Valdocco)에 전세계를 포괄하는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는 이 회의 발판을 더욱 굳히기 위해 1868년 그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을 중심으로 살레지오회를 창립하고 다시 1874년엔 마리아 동정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강압과 체형 대신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 지도를 하는 교육방법을 채용하였다. 또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긴밀한 신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인 수단을 이용하였다. 그의 교육적 성과는 도제(徒弟)학교, 공업학교, 일요학교 및 야간학교 등 어느 곳에서나 두드러져 사회적 모범이 되었다. 따라서 돈 보스코를 근대 사제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손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다. 그는 미묘한 개인적인 문제나 정치적 문제에까지 탁월한 조언을 했을 뿐 아니라 근대 포교운동의 개척자였으며, 호교학 및 교육부문에 1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1929년 6월 2일 시복, 1934년 4월 1일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보속 [한] 補贖 [라] satisfactio [영] satisfaction
넓은 의미로 끼친 손해의 배상(compensatio) 및 보환(restitutio)을 뜻하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벌을 받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 안셀모(St. Anselmus)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죄를 충분히 보속한다고 주석한 데서 비롯한단. 가톨릭 윤리신학상의 보속은 고백성사의 본질적 요건의 하나로서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이요,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는 성세성사로써 벌까지도 다 사하지만 세례 후에 범한 죄는 고백성사로써 사하여진다. 그러나 그 죄의 벌까지도 다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벌만 사하여질 뿐 잠벌은 남아 있게 된다. 잠벌이란 영원한 벌에 대하여 일시적인 벌, 혹은 연옥벌이란 뜻이며 이는 우리 자신이 기워 갚아야 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보속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속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당신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시오”(마태3:8)라는 말씀대로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였다(D. 904, 906). 구약성서에서도 죄는 용서받았으나 벌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원조는 은총상태로 회복되었으나 고통과 죽음은 면치 못했고(창세 3:l6) 모세의 불신은 용서받았으나 약속한 땅에서 제외되었다(민수 20:12).신약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로마 2:6) 했고, 바울로는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라고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는 보속이 너무 엄하였다. 이 엄한 보속은 세월이 지나면서 약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도 하느님의 공의보다는 사랑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보속은 점차 가벼운 것으로 변하였다. 전통적으로 자선, 금식, 기도는 보속행위의 새 유형이다. 이 행위들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재물, 신체, 영혼에 있어서 하느님 앞에 겸손해진다. 보속은 자신의 죄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나 물질적인 손해를 진정으로 기워 갚고자 하는 정신으로 실행되어야 하므로 응보적이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적인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보속이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한 그것은 공로를 세우는 바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Franz Lakner, Satisfaction, Sacramentum Mundi, III / 裴文漢, 補贖의 意味와 實踐方法, 司牧, 54호.
보성본당 [한] 寶城本堂
1941년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동륜동(全羅南道 寶城郡 寶城邑 東倫洞)에 창설된 광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순천(順天) 본당의 공소로 출발하여 194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김창현(金昌鉉, 바오로) 신부가 부임했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광주교구에서 사목하던 에이레의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이 일제(日帝)에 체포, 구금됨으로써 신부 수가 부족하게 되어 1942년 보성 본당은 다시 순천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그 후 1955년 골롬바노 외방전교회의 모리시(M. Morrlssey, 牟) 신부가 부임,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현재의 본당 주임은 윤용남(尹勇南, 가리노) 신부이며 1983년 말의 교세는 교우수 805명이다. 그리고 성모성심수녀회가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전교를 돕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