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전교약기 [한] 全羅道傳敎略記

1933년 박제원(朴齊元)이 구술(口述)하고 김 베드로가 필기(筆記)한 전라도지방의 전교사(傳敎史). ≪전라도전교 약기≫는 1886년 한불(韓佛)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시기의 전교상황을 총 102장(張)의 분량에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22장에서 72장까지의 내용으로 구술자 박제원이 영세, 입교한 1885년 이후부터 10여년간의 전라도지역 전교상황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어 지하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둘째 부분은 72장 이후의 내용으로 고산 되재[升峙], 전주(全州), 수류(水流), 나바위[羅岩]본당의 창설내력과 연혁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 외에 책의 첫머리와 끝에는 서(序)와 발(跋) 형식의 글이 실려 있다.

구술자 박제원은 원래 경상도 거창(居昌) 사람으로 1885년 전라도에 와서 조스(Josse, 趙)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은 뒤 가족들과 함께 전라도로 이주하여 사망하기까지 조스, 라프르카드(Lafourcade, 羅),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 등 9명의 신부를 복사(服事)하며 전라도 지역의 전교에 힘썼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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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본당 [한] 殿洞本堂

조선조시대의 전주는 한양 이남에 있는 손꼽히는 웅도(雄都)이며,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있던 고도(古都)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전동’은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현재의 전동본당이 터 잡고 있다. 신유(辛酉)박해 때(1801년)에는 이곳에서 유항검(柳恒儉)과 유관검(柳觀儉)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尹持憲), 김유산(金有山), 이우집(李宇集) 등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연혁이 얽힌 이 고장에 1889년 책임을 맡고 부임한 보두네(Baudounet, 尹) 신부가 1891년에 소양면 대성동(所陽面 大成洞)[당시 지명]에 성당 대지를 매입, 1908년에 프와넬(Poisnel, 朴) 신부 설계로 성당 준공을 보아, 초대(1889∼1915년) 주임신부로 취임 활약하였다.

이리하여 2대(1915∼1918년) 라크루(Lacrout, 具瑪瑟, 마르셀로) 신부는 성당 내부와 외부의 미화작업을 끝냈고, 1차 대전으로 인하여 출전하게 되었다. 3대(1918∼1920년)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거쳐 4대(1920∼1929년) 라크루 신부가 재취임, 사제관을 신축하고, 여교당(학원)을 설립, 최정숙(崔貞淑, 베아트릭스)에게 교장직을 위임하여 처녀들에게 교리와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1929년 8월 11일 라크루 신부의 선종 뒤, 5대(1929∼1937년)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는 1931년 전라도 감목대리구 감목대리직을 겸하였는데, 이 당시 부호 교우인 이학수(李學秀, 바오로) 회장과 그 아들 3형제는 경제적인 협조로 성당의 중요기관을 설치하는데 크게 도움을 끼쳤다. 1937년 전주교구 승격에 따라 김 신부는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뒤를 이은 6대(1937∼1938년)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는 1938년 3월 이미 건축되어 있던 교사에다 해성여학교(海星女學校)를 정식 설립하였다. 7대(1938∼1940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8대(1940∼1941년)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9대(1941∼1942년) 최민순(崔玟順, 요한), 10대(1942∼1944년) 김후생(金後生, 바오로), 11대(1944년)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2대(1944∼1947년) 이상화 신부, 13대(1947∼1954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14대(1954∼1961년) 강윤식(姜允植, 베네딕토), 15대(1961∼1963년) 오기순(吳基順, 알베르토), 16대(1963∼1967년) 김종택(金鍾澤, 요셉), 17대((1967∼1969년)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18대(1969∼1972년)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19대(1972∼1974년) 범석규(范錫圭, 마티아), 20대(1974∼ ) 김환철(金丸喆, 스테파노) 신부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동본당은 전주시 전동 200의 1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방지거 사베리오를 주보로 하고 있다. 건평 189평, 대지 4,000평이며, 부속건물은 160평이고, 1947년도에 설립된 성심유치원이 부속기관으로 되어 있다. 1984년 현재 신자총수는 3,564명이고, 전주 중앙본당(中央本堂)이 주교좌 성당이 되기 전까지에는 전동본당이 전주 주교좌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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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한] 傳道書 [라] Liber Ecclesiastes [영] Book of Ecclesiastes

전도서는 성서 중심사상의 발전과정에서 새로운 단계를 제시해 주는 작품이다. 개별적인 상선벌악(賞善罰惡)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나 전통적인 교의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선 욥기와 유사한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점도 보이고 있다. 욥기는 고통이 필연적인 죄의 결과가 아니며 죄의 탓과 아무런 상관없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렇다면 덕행에 대한 참된 대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 제시해 주고자 하는 것이 전도서의 주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1. 저자와 저작연대 : 구약성서 46권 중의 한 권인 전도서(傳道書)가 히브리어 성서에는 코헬렛(Qohelet)이라는 서명(書名)으로 나타난다. 코헬렛은 ‘집회’를 의미하는 카할(qahal)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집회에서 말하는 사람’ 즉 사회자나 설교자를 가리킨다. 그리스어 성서번역자들 역시 ‘집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파생된 에클레시아스테스(ekklesiastes, 설교자)를 본 작품의 서명으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이든 에클레시아스테스든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전도서 1:1절은 코헬렛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밖에 1-2장 안에서 솔로몬왕의 삶을 암시해 주는 대목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작품이 유태교 랍비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비교적 후기의 히브리어로 저술되어 있고 아랍어적인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나 전통교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유배시대 이후에 기초된 것으로 본다. 또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전도서 두 개의 단편이 쿰란 제4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최소한 마카베오시대 이전에 본 작품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그 저작연대를 대략 기원전 3세기로 추측하고 있다. 본질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저자는 그 작품구성에 있어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저자가 살던 시대는 그리스제국시대(333∼367년)였으며, 당시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의 프톨레메오 왕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이집트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무튼 당시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리스의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 역시 이러한 시대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비록 사물을 보는 방법은 히브리적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벌써 그리스사상을 다분히 풍기고 있다.

2. 구조와 내용 : 전도서를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문맥이 끊긴다거나 주제가 갑자기 바뀌는 사정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본 작품에 여러 저자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보는 성서주석가들도 있으나, 비교적 후기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는 끝말 부분 12:9-14절을 제외한다면 작품의 단일성을 단언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작품 속에서 풀기 어렵게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선임자들의 견해를 논박하기 위해서 그들이 작품을 자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주기적 변화를 노래한 머리말(1:3-11) 다음에, 본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제1부라고 볼 수 있는 1:12-2:26절이 뒤따라 나온다. 여기서 설교자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자기반성을 하게 한다. 아가(雅歌)가 솔로몬의 영화(榮華), 업적 그리고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반면, 전도서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폭로하고 있다. 향락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고 설교자는 말한다.

제2부(3:1-6:12)에서 설교자는 영원성과 순간성을 비교해 나가면서 각개 인간은 부정적인 면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실재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현자(賢者)는 상대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운명의 신비 앞에서 철학적인 고뇌를 표명한다(3:22, 6:12). 인간의 삶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1:3, 2:22, 3:9, 5:15) 인간은 자기존재의 모순성을 피할 수 있는가? 좌절에 대한 혐오감만이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설교자는 결국 자살과 쾌락욕 중에서 인간다운 참된 행위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제3부(7:1-12:7)는 제2부의 첫머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교법을 사용하여 좋은 일들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저자는 지혜론을 펴 나가면서 정의, 여인, 권력행사, 운명의 비밀, 부패하고 비참한 세계 안에서의 사회현실 등과 자신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욥기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설교자 역시 현자들의 형식주의와 내용이 텅빈 화법을 공박하기도 한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말이 많아진다”(10:14). 끝말 또는 부록으로 볼 수 있는 12:9-14절은 후기에 첨가된 부분으로 보이며, 본서의 출처와 권위에 대하여 유태인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다섯 전례 두루마리(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델) 중의 하나로서 예나 지금이나 유태교 회당에서 초막절 제3일에 낭독되고 있다.

3. 메시지 ① 인생관 : 설교자의 정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를 염세주의자,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로 보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다양한 견해는 그 나름대로 이를 입증할 만한 문구를 작품 속에서 찾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어느 것도 저자의 정신을 완벽하게 밝혀 주지는 못한다. 설교자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의 실질적인 섭리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인이다(3:11 · 14-15, 8:17, 11:5). 쾌락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삶의 기쁨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며(2:24, 3:13, 5:18, 9:7), 오히려 쾌락에 대한 남용을 단죄하고 있다(2:1-2, 11:8.10). 또한 설교자가 회의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자신 회의론자는 아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6:10, 12:7). 따라서 우리는 그를 현실주의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삶을 하느님의 선물 즉 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이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자 하는 참된 인생관이다.

② 하느님의 섭리 : 설교자는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기계적인 개념을 배척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갚아야 할 것[借邊]과 가지고 있는 것[貸邊]을 엄격하게 대조해서 계산해 주는 회계사가 아니다. 덕행과 범죄에 비례해서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의무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거래자가 아니다. 저자는 몇몇 현자들의 순박한 낙관적 정신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상을 부정한다.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알 사람은 없다. 이런 일을 안다고 장담할 현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도 8:17). 여기까지를 욥기의 결론으로 본다면 전도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지상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천명하면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온통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이 잘 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 가거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7:14). (金建泰)

[참고문헌] A. Barucq, Ecclsiaste, coll. Verbum Salutis Ancien Testament 3, Beauchesne, Paris 1967 / H. Cazelles, Introduction critique l’Ancien Testament, Desclee, Pari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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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표 [한] 全德杓

전덕표(1920∼1950).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1920년 4월 16일 황해도 은율군 은율읍 남천리(殷栗郡 殷栗邑 南川里)에서 부(父) 전인택(全仁澤)과 모(母) 유루갈다(柳∼)의 3남 3녀 중 막내로 출생. 은율보통학교 졸업 후, 당시 은율본당 주임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입학,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와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를 졸업하고 1946년 11월 21일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주례로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황해도 사리원(沙里院)본당 보좌신부로 임명되어 12월 20일 38선을 넘어 부임. 당시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환갑이 넘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주임신부를 대신하여 헌신적으로 사목하였고, 학생회, 소화데레사회, 예수성심청년회, 성모성미부인회, 요셉 노년회 등 많은 단체를 조직, 전교에 힘써 신입교우가 전체의 80%를 차지하게 하였다. 1950년 10월 12일 미사를 집전하던 중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었는데, 그 미사는 북한교회에 있어 맨 마지막으로 봉헌된 미사였다. 며칠 후 사리원성당에서 1㎞정도 떨어진 정치보위부 방공호 속에서 입에 솜이 틀어 막히고 목과 양손을 전깃줄로 묶인 채 온몸이 전기고문당한 상처투성이의 시신(屍身)으로 발견되었다. 1977년 사리원 출신 교우들이 전덕표 신부를 추모하여 ≪북한교회의 마지막 종≫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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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사 [한] 全大赦 [라] indulgentia plenaria [영] plenary indulgence [관련] 대사

죄에 대한 유한(有限)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언제 전대사를 받을지, 혹은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만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전대사를 주거나, 주지 않는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내적 조선과 외적 조건이 주어지는데, 내적 조건은 “소죄(小罪)를 포함한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고, 외적 조건은 고해성사, 성체배령, 교황이 지시한 기도 등 3가지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고, 만일 어느 하나라도 불충분하다면 한대사(限大赦)밖에 받을 수 없다. 전대사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진다. (⇒)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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