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비아시 [원] Sambiasi, Franciscus

Sambiasi, Franciscus(1582-1649).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중국명은 필방제(筆方濟), 자(字)는 금량(今梁). 남부 이탈리아의 코센차(Cosenza)에서 출생. 1603년 예수회에 입회, 1609년 일본의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중국으로 가기를 희망하여 1610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613년 북경(北京)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3년 동안을 전교하다가 남경(남경)에서 일어난 박해의 여파가 북경에까지 미치자 피신, 손원화(孫元化)의 요청으로 가정(嘉定)을 개교(開敎)시켰고 상해(上海) · 송강(松江) 등지에서 전교하였다. 1638년부터는 남경에서 전교하다가 1644년 청병(淸兵)이 남경을 공격하자 광동(廣東)으로 피신, 그 곳에서 전교하였다. 1649년 광동에서 사망, 마카오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영언여작≫(靈言蠡勺, 2권, 嘉定 1624), ≪수답≫(睡答, 1권), ≪화답≫(畵答, 1권), 그리고 마카오에 로드리게즈(Rodriques, 陸若漢)신부의 묘지를 짓게 해 달라는 ≪주소≫(奏疏) 등이 있다. 이중 ≪영언여작≫은 18세기초에 조선에 전래되어 많은 학자들에게 읽혔고,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그의 저서 ≪서학변≫(西學辨에서 ≪영언여작≫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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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본요리 [한] 三本要理 [관련] 삼본문답

⇒ 삼본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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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본문답 [한] 三本問答 [관련] 성교요리문답

교리문답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문답, 즉 영세문답, 고해문답, 성체문답을 가리킨다. 한국 교회의 최초의 공식교리서는 ≪성교요리문답≫인데 이 교리서는 한문본에서 번역한 것으로 1934년 새 교리서인 ≪천주교요리문답≫이 나오기까지 수없이 수정되어 판을 거듭하면서 내려왔다. ≪성교요리문답≫에는 삼본문답, 즉 영세, 성체, 고해 외에 견진문답이 수록되어 있어 이를 사본요리(四本要理)라고도 부른다. 견진문답이 제외된 삼본문답이 따로 간행되었는지는 아직 미상이나 1801년의 박해 때 정부가 압수한 천주교 서적 가운데 ≪삼문답≫(三問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본문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삼본문답의 본연의 의의는 그런 표제의 고유한 저술을 뜻하기보다는 영세 예비들을 위한 하나의 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887년의 한국 교회 지도서에 의하면 영세 · 고해 · 성체 등 세 문답이 영세조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삼본문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교요리 문답 중에서 영세예비에 절대로 필요한 영세·고해 · 성체문답을 삼본문답으로 부르고, 나머지 견진문답까지 합친 것을 사본요리로 부르게 된 것 같다. (⇒) 성교요리문답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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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본당 [한] 三浪津本堂

주보로 ‘성녀 소화 데레사’를 모시는 이 본당은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송지리(密陽郡三浪津邑松旨里) 매봉산 기슭에 지도적인 신자들이 교회대지 1,500평을 사들여 임시 성당겸 사제관을 지어 1930년 초대 주임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신부를 맞음으로써 창설되었다. 당시의 신자수는 약 300명. 1932년 프랑스인 박(朴)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야간학교를 세우고 전교에 힘쓰던 중 병환으로 귀국하고 1935년 3대 주임으로 프랑스인 페네(C. Peynet, 裵) 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전교하였다.

그런데 그 뒤를 안드레아(한국명 柳興模) 신부가 이어 재임하던 중, 1939년 본당을 밀양읍으로 이전하고, 삼랑진 교회의 건물과 대지는, 대구교구청에서 모두 매각 처분함으로써 이 본당은 한때 근거지마저 잃게 되었다. 그 까닭은 본당 내부의 불화가 심했던 탓으로 전해지고 있다.

8.15광복 후 교인들은 전에 팔았던 교회 건물과 대지가 모두 일본인 소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불하받아 본당을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일이 수월찮아 시일이 걸리던 중 6.225전쟁이 터져 또 정체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지도적인 신자들과 청년회의 열의로 본당 부활운동이 다시 일어나 1951년 성당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1952년 초가2동을 사들여 우선 공소강당을 만들었다. 그 뒤 1956년 부산진 감목대리에게 간절히 탄원한 결과 당시 밀양본당 정수길 신부와 상의한 후 구호물자로, 숙원이던 본래의 본당 대지와 건물을 되사들이게 하였다.

1957년 2월 유선이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삼랑진본당은 마침내 감격적인 부활을 보았다. 그러나 1958년 11월 최재선 주교의 순시를 받은 뒤, 12월에 유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기구한 운명의 이 본당은 또 밀양교회의 공소로 되었다. 그리고 1962년 7월 정수길 신부를 주임으로 맞으면서 본당으로 또 재출발하였다. 그와 함께 9월 26일에는 흙벽돌 움막을 지어 음성 나환자 정착촌인 ‘루카원’을 개설하였다. 1965년 12월 한영일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여 전임 신부 때부터 노인회와의 말썽을 풀어나가면서 교구와 협의하여 수십년래의 숙원이던 현대식의 웅장한 성당을 지어 1968년 11월 10일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본당은 현재 이찬우(李讚雨, 요셉) 신부가 주임을 맡고 있으며 신자수 809명에 1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아온 주임신부는 초대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신부를 비롯하여 1957년 다시 본당으로 부활한 뒤, 유선이(柳善伊, 요셉), 정수길(鄭水吉, 요셉), 한영일(韓永日, 니고나오), 이상호(李尙護, 라이문도), 정행만(鄭行萬, 프란시스코), 안달원(安達遠, 베드로), 이돈우(李敦雨, 레오), 길레르모(Guillermo, 요셉), 손덕만(孫德萬, 토마스), 양덕배(楊德培, 요한), 송기인(宋基寅, 베드로)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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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구본당 [한] 三道溝本堂

1940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삼도구시(滿洲 間島省 延吉縣 三道構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하프너(A. Hafner, 韓)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성당을 건축하고 교세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체포되고 아울러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이 몰수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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