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박해 [한] 乙卯迫害 [관련] 을묘실포사건

을묘년(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이른바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야기된 박해. 진산(珍山)의 천주교인 윤지충(尹持忠)의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해 일어난 1791년 신해(辛亥)박해가 가라앉자,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등 중인계급의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끈질긴 선교사 영입 운동으로 마침내 1794년 말에는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사실과 그의 거처가 관가에 알려지자, 1795년 6월 27일(음 5월 11일) 포장 조규진(趙圭鎭)은 포졸을 거느리고 그의 거처인 최인길의 집을 덮쳤다. 그러나 주 신부는 이 사실을 미리 통고받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므로, 포졸들은 최인길을 주 신부로 오인하고 체포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가 아님을 뒤늦게 안 관가에서는 주 신부를 중국으로부터 인도해 온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을 잡아들였다. 이들을 판관 앞에서 한결같이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고 주 신부의 도피처에 대한 심한 고문에도 일절 함구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 맞은 매로 그 이튿날 숨을 거두어 순교하였다.

이들 세 사람을 타살한 사건은 곧 물의를 일으켜,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등 세 사람이 이 사건으로 연유해서 좌천 또는 유배되어, 그들을 배교케 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그 밖에도 을묘박해로 최인길 등과 함께 잡힌 교우가 5명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홍낙민(洪樂敏)으로, 그는 초기 교회 창설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으나 이미 신해박해 때 배교했고, 이번에도 또 다시 배교하였다.

주 신부로 인해 발달된 을묘박해는 서울에서 일단락되었으나, 지방에서는 도리어 박해가 더욱 심해져 갔다. 이리하여 경신년(1800년)의 박해를 유발했고, 그 이듬해인 신유년(1801년)에는 대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케 되었다. (⇒) 을묘실포사건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黃嗣永帛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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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한] 隱花

박해(迫害)를 주제로 쓴 윤의병(尹義炳, 1890~1950) 신부의 미완성 역사소설(歷史小說). 기해(己亥)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해 1939년 1월부터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연재되어 1950년 6월 저자가 인민군에게 피납되기 전까지 만 11년 동안 원고지 2000여 장이 연재되었다. 박해시대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모습, 그리고 순교(殉敎)를 소재(素材)로 박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며 신앙을 증거하려는 교우들의 고뇌와 비애와 인고와 기쁨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1977년 제자 이계중(李啓重) 신부가 자신의 사제생활 30주년을 기념하고 자신을 신학교로 보낸 저자 윤의병 신부의 유덕을 기리는 뜻으로 단행본 ≪은화≫(4 · 6판, 500면,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를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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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한] 恩惠 [라] gratia [영] grace [관련] 은총론

일반적인 경우 고맙게 베풀어주는 신세나 혜택을 지칭하여 ‘은혜’ 또는 줄여서 ‘은’(恩)이라고 한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 중요시 되어온 이 ‘은혜’는 보은설화(報恩說話)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받은 혜택 혹은 주어지는 호의를 말한다. 우리의 전통사상에서는 부모의 은혜가 하나의 본보기로 되어 있으며 받은 호의와 혜택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큰 본분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이 공통적 인식은 종교적 차원에서 보완되고 완성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은혜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의 은혜를 깨닫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이 은혜를 성총(聖寵), 은총(恩寵) 등으로 표현한다. (⇒) 은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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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론 [한] 恩寵論 [라] De gratia

1. 개념 : 은총은 “높은 이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이라고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성서의 기본사상과 들어맞는 말이다(출애 33:12). 은총은 분배정의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호의와 자비로서 거저 베풀어진 혜택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세사(救世史)를 이루는 계시와 결약(結約) 덕분에 충실과 의리에 관한 개념도 포함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결약을 지키는 분이시므로 인간들을 그저 내버려 두지도 않으신다. 또한 그분은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일단 은총을 베푸시면 쉽게 거두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은총은 견고성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본에서 말하는 ‘카리스’(charis)란 단어는 원래 아름다운 자태를 의미했지만 성서의 사상과 부합하여 호의, 자비 그리고 혜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서, 특히 바울로 서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구약성서의 사상을 이어 받고 재평가하여 은총이란 단어를 대단히 즐겨 쓰고 있다. 이제 은총은 창조사업을 비롯하여 영생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해내신 묘한 일들이며,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자신을 인간에게 내놓으신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시는 그대로를 계시하셨기에 은총은 인간에 대한 자비로우신 태도나 호의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놓으시는 것을 뜻한다.

은총은 선물이니만큼 어떤 강요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신 인간의 반응과 관게없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은총에는 증여의 성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은총은 당사자의 일방이 자기 재산을 무상으로 상대분에게 줄 의사를 표시하고 또한 상대방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은총 문제에 있어서는 그 차원과 성격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입장과 동시에 인간의 입장도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계시되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신약성서 전체는 ‘은총사’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울로 못지않게 하느님의 계획 뿐 아니라 인간이 누릴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완성될 신인상봉을 묘사해 주고 있다. 바울로 이외의 신약성서 작가들도 구약성서에서 이어받은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인(神人)상봉을 그리스도적인 상봉이라고 고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즉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예수의 모습, 자기 자신만 의지하려는 자들을 단죄하시는 최후 심판자에 관한 묘사 등은 은총의 신비를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역할을 대변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이제 은총이 있다면 다만 그리스도의 은총이 있을 뿐이다. 나아가 교회도 계시의 풍부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은총의 신비를 나름대로 표현했고 또 그 표현들을 정리하면서 이에 관한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방교회 교부들은 은총을 ‘신성에의 참여’(2베드 1:4)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의 현존과 ‘인간의 신화’(神化)로 보았다. 그리고 ‘은총의 학자’로 불려지는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모시는 인간의 입장에서 은총의 신비를 묘사했으며, 성 토마스는 인식과 사랑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은총의 신비, 즉 신인상봉의 신비를 유추적으로나마 설명하려 하였다. 최근에 와서 현대교회는, 죄악에서 해방되어(로마 6:18-22) 참된 아드님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유’개념(요한 8:34-36)을 애용하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체개들은 아니지만 은총의 종류가 많아졌다는 인상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은총은 단순한 행위이며 하느님 안에서 어떠한 변함도 일으키지 않으나,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 접근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므로 부득이 은총을 구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은총생활에 있어서는 성사의 역할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으나 이 ‘많은 은총’을 신인 관계 문제 즉 하느님의 호의와 은혜 그리고 인간의 반응과 변화를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좋은 실례로 볼 수 있다.

2. ‘아드님’ 안에서의 자녀들 : 은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놓으시는 행위이기에 인간을 찾아주시는 하느님(요한 14:23)께서는 전통적인 표현대로 ‘창조되지 않으신 은총’이라고 한다. 원래 인간은 죄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한 인간 자체로도 하느님을 모실 자격조차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을 모실 합당한 자로 만드시고, 또한 하느님을 모실 소질을 갖게 하셨다. 이 소질은 우리의 인간성을 다른 본성으로 변질시키지 않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선물이다. 이 기본적 소질과 함께 우리의 영적 기능 – 의지 · 이성 등 – 을 새롭게 하는 향주덕(向主德)도 선물로 받게 된다. 이 소질과 향주덕은 전통적인 표현대로 ‘창조된 은총’이다. 이 창조된 은총은 우리 인간 안에서 효과를 내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선물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창조된 은총은 하느님을 모실 선행조건도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쌓인 장벽도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해내신 필수적인 효과일 따름이다. 따라서 창조된 은총과 창조되지 않으신 은총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으나, 다만 하느님과 인간의 입장이 각각 다르므로 그들을 구별 할 따름이다(에페 2:7-10). 흔히 쓰이는 용어인 ‘성화은총’은 창조되지 않으신 은총 –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하느님 – 과 창조된 은총 – 하느님을 모시는 소질 – 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신학자는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존은총’이라고도 불리는 성화은총을 창조된 효과와 동일시하지만, 그들도 의인(義人)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소위 ‘조력은총’은 창조된 은총에 속한다. 은총은 어려운 인생 고비에서 우리를 구할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매사에, 즉 하느님을 찾는 순간부터 선행을 할 때마다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구원의 무상성을 대변하고 있다.

성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주셨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 구원을 마련하셨다(로마 5:6-10).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드님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는가?”(로마 8:32) 따라서 모든 은총생활은 인간이 되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말씀의 강생으로 시작된 참된 신인 상봉은 죽음과 부활로 완성된다. 아드님은 자신이 취하신 인간성을 통해서 아버지와 변함없는 부자관계를 유지하시고 신인 간에 다리 역할을 하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시다(1디모 2:4-5). 아드님의 몸이 됨으로써 그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성화되어 우리의 인간성을 새롭게 하는 모든 은총의 원천이다.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이 몸을 통해서 아버지의 용서를 죄인들에게 베푸셨으며, 부활을 통하여 그 아드님은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생명으로 사시고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보내주신다(사도 2:33).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세례성사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생활이며, 이 신앙생활은 또한 인간의 의화(義化)로 출발한다(로마 4:25).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문에 따라(1547년 1월 13일), 의화는 죄의 용서와 인간의 내적인 쇄신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면서 의롭게 만드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선언이 당장 효과를 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다. 비록 죄에 대한 성향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로마 6:12) 용서를 받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없다. 하느님과 원수였던 인간이 이제부터 하느님의 친구가 되어(요한 15:14-15, 로마 5:10) 아드님 덕분에 아버지와 화해되었다(2고린 5:19).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그 의는 이제 우리의 것이다. 이 의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해내신 초자연적인 효과이며 또한 창조된 은총이다. 여기서 의화은총과 성화은총은 완전히 부합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의인인 동시에 성인으로 만드시기 때문이다(1고린 6:11, 에페 4:23-24). 사실 바울로는 로마서에서 화해의 신비를 설명할 때, 유태인들을 상대로 ‘의화’개념을 사용했고, 외교인들을 상대로는 성화개념을 사용하였다.

이 효과와 더불어 이 효과를 내신 하느님께서 몸소 의인과 함께 반드시 계신다는 사실은, 성서가 ‘선사되신 성령’이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로마 5:5).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며(로마 8:9-27, 1고린 12:3-13) 우리를 성화시키신다. 하느님의 현존은 천주성삼 제3위이신 성령과 결부되어 있는데 이는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떼어놓을 수가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뜻이다(요한 14:23).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 가운데 임하시므로 성서도 그리스 사상의 속하는 ‘참여’란 개념을 차용하여 우리가 신성에 참여한다고 표현하고 있다(2베드 1:4). 물론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부들의 설명에 따르면 참여란 개념은 절대적인 의존을 뜻하고 있기에 이 개념을 범신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신성에 해당되는 불멸의 참여로 해석되어야 한다. 부활로써 완성된 이 불멸의 참여가 미리부터 신인결합을 암시하고 있다.

신인관계도 죄의 용서 및 내적 쇄신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몸소 내주하시는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창조하시고 살리시기로 결정하시는 하느님 측에서 볼 때 이 신인관계가 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비록 죄인이 되었을망정 인간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생명의 하느님이시지 멸망의 하느님이 아니다(에페 1:3-5).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인 관계가 놀라울 만큼 새로워졌다. 하느님께 거역함으로써 죄의 결과인 벌을 면할 수 없게 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간(로마 7:13-25)은 이제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하사하신 선물이다. 대내적인 관계 – 성부, 성자, 성령을 서로 맺는 관계 – 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생명으로 살게 된 믿는 이들은 바로 이 대내적 관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파견되신 독생성자인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당신 자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되신 아드님과 결합되어야만 아버지의 양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갈라 3:26-28). 그리고 이 결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로마 8:9).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드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며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로 부른다(갈라 4:5-7, 로마 8:14-1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서 성령에 의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다. 이제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하느님이 아니라, 참 아드님의 아버지이신 천주 성삼 제1위이시다.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로마 8:29)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이 교회 안에 우리를 모으신다. 교회는 아드님이 현존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아드님과 결합시키시는 장소이면서 성서와 성사를 통해서 용서와 화해를 베푸는 은총의 도구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온 인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회는 원래 신인관계의 성사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사를 통해서, 특히 성사들의 절정인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능력으로 축성되고 모인 몸, 그리고 아버지께 드리는 몸이 되게 한다.

3. 은총론의 제반 문제 : 은총론은 기묘한 신인 관계를 다루고 있으면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입장 –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 과 인간의 입장 – 제한성과 무한을 향하는 개방성 – 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검토해야 되며 또한 성서가 전해 주는 계시의 내용과 인간이 얻은 경험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인관계의 표현에 쓰이는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철학적 배경도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 예컨대 고대에는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을 내포하는 존재개념으로 꾸며진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신관이 통용됐지만, 인식 문제조차 재검토하는 칸트의 이후의 시대에는 신을 체험한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역할과 신인 관계를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예부흥시대부터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이유가 있다면, 이는 자유와 인간성 개념의 외연 문제를 들 수 있다. 교부들과 중세기의 신학자들이 자유와 인간성을 다룰 때는 반드시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과 천당에서 누릴 지복직관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근대 인간학에 발달에 따라 신학자들은 하느님께로의 소명없는 인간성 및 은총을 제거한 인간성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원죄에 의해 무력해진 자유 때문에 인간은 최후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게 된 것과, 부패된 인간성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이성의 판단이 선과 악을 구별 못할 정도가 된 것을 혼동하였다. 자유문제를 새롭게 의식하던 근대의 신학자들은 자유의 상실과 동시에 은총의 강요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사이에서 합의문 역할을 했어야 했던 아우크스부르크 신조(1530년)가 거부되었기에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지나친 의견을 단죄하면서 전통적인 교리를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원죄 이전과 이후에 은총의 필요성을 달리 이해하던 바이우스(Baius, 1513~1589)와 얀세니우스(Gornelis Jansenius, 1585~1638)의 이단적인 사상도 단죄해야 하였다.

교회는 인격에 해당하는 자유를 부단히 주장해 왔으며, 또한 원죄나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인간이 범하는 죄에 관계없이 구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는 “은총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펠라지우스(Pelagius, 360~422년)의 의견을 단죄하는 카르타고 공의회(418년)의 결의문을 되풀이 하면서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꾸준히 가르쳐왔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께 반대하지는 못하겠으나 은총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자유를 대립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차원과 인간이 행동하는 차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정하시는 순간부터 심판을 내리실 때까지 우리 인간의 역사를 한 눈으로 안배하시므로, 이미 인간의 행동을 아시고 최후상태를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사랑하셨다”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기계적인 결정론으로 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는 사전의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게끔 충분한 은총을 주시고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 이 효율적인 은총을 받았다”고 주장하던 16-17세기의 신학자들[De Auxiliis, 논쟁의 종지부, 1607년]은 부족한 표현으로나마 은총의 효율성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사색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쟁점이 되었던 공로(功勞)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공로를 쌓아 은총과 구원을 상으로 얻는다”는 의견은 이미 교회가 단죄해 온 펠라지우스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업적은 은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받은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원리에 따라 은총의 무상성과 실재성을 강조해야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선물을 우리의 공로로 만드신다. 신앙조차도 은총의 선행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느님의 자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과 이 사랑은 곧 나의 마음이요 나의 사랑이다. “내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 5:34). (文世華)

[참고문헌] Thomas Aquinas, Summa theol., 1,2 / Billuart, De gratia, Lequette편 III 및 Salmanticenses, Tractatus XIV: De gratia(Cursus theol. IX이하), Paris 1870 / R. Cercia, De gratia Christi ed.3, Paris 1879 / C. Mazzela, De gratia Christi ed. 5, Roma 1905 / J. van den Meersch, De divina gratia Bruges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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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논쟁 [한] 恩寵論爭 [라] Controversia de gratia [영] controvercy on grace [관련] 은총론

넓은 의미로 교회사상 은총신학의 여러 측면에 대한 일련의 논쟁을 뜻하나 좁게는 도미니코회 학파와 예수회 학파 간에 일어난 ‘도움에 관한 쟁론’(disputatio de auxiliis)을 가리킨다.

초기 교회 때 가톨릭의 은총교리는 최초로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이레네오(Irenaeus)와 오리제네스(Origenes)는 성령의 내주(內住)와 그리스도의 현존을 각각 강조하여 반박하였다. 또 성령의 신성(神性)을 공격한 마체도니아주의에 대하여 바질(Bazil)과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성령이 성화자(聖化者)이심을 들어 논박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 교회는 삼위일체의 바탕위에서 은총교리를 전개시켰고 하느님의 내주를 부각시키는 경향이었다. 서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가 지니는 역할을 강조한 펠라지우스(Pelagius)에 맞서서 하느님의 은총을 역설하였다. 이 둘의 입장은 은총과 자유의 문제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세기에 베네딕토회원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는 아우구스티노의 예정설을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라바노 마우로(Rabanus Maurus)의 비판을 받았고, 아벨라르도(Aberlardus)가 펠라지우스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고집하다 베르나르도의 비난을 받았다.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 머무르면서 그리스 교회에서 강조된 하느님의 내주를 부활시켰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전혀 무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그 본성이 완전히 부패되고 자유마저 상실했으므로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 구원이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일 뿐이며 인간을 내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에 대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는 기본입장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할 가능성은 인정하고 인간을 향한 인격적인 하느님의 자비(창조되지 않은 은총)가 인간에서 작용을 발한다(창조된 은총)고 한다. 이 공의회 이후 자유와 은총과의 상관성, 특히 조력은총이 자유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는 은총론의 핵심문제로 부각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작용하므로 인간에게 긍정이나 부정의 태도를 표명할 여지를 남기는 한편, 하느님은 인간 자유의 주인이기도 하므로 그 은총은 여전히 효력있는 은총이여야 한다. 즉 영향력 있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할 수 있는 인간 자유의 가능성, 이 둘의 작용이 문제된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은총을 두 가지 유형, 즉 충족은총(充足恩寵, gratia sufficiens)과 효능은총(效能恩寵, gratia eficax)으로 분류함으로써 개념적으로 해소하고자 하였다. 전자는 각 인간에게 제공되며 그 은총의 수용여부가 인간의 자유에 좌우된다. 그러나 후자는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거역할 수 없이 당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은총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은총관계를 둘러싸고 몰리나(Lo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학파와 바네즈(Domingo Banez, 1528~1604)를 대표로 한 도미니코 학파간에 다툰 사건이 ‘도움에 관한 쟁론’이다.

양면의 이론들은 사변적인 치밀성을 지니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예수회 학파는 인간의 자유에 고도로 가능한 공간을 부여하며 모든 인간에게 제공되는 은총인 충족은총에 착안한다. 이 은총은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효능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도미니코회 학파는 하느님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효과를 발하는 효능은총에 착안한다. 이들에게 있어 충족은총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이 인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한테서 목표의 이르지 않음을 단정하려는 추상적 상대개념(相對槪念)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의 결과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고 다만 양편에서 극단적인 해결책만이 배격되었을 뿐이다. 즉 만사가 인간의 자유에 좌우되어서 은총은 자신을 자율적으로 성취하는 인간을 돕고 지원하는 기능만을 지닌다는 해결책이 배격되는 한편 만사가 하느님께 좌우되어서 인간의 자유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해결책이 또한 배격되었다.

은총논쟁에서 관건이 된 문제 속에는 이론적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기본 신비가 존재한다.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하느님의 전능과 인간의 자립, 무한한 존재와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은총을 새로운 관점에서 발견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 은총론

[참고문헌] C.M. Aherne, Controvercy on Grace,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6, McGraw-Hill, 1967 / Karl Rahner, Structure of de Gratia, Sacramentum Mundi, vol. 1, Burns & Oates, 1968 / G. 그레사케 著, 심상태 譯, 은총, 성바오로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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