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신학교에서 한국인 성직자를 대상으로 1912년부터 대략 1937년까지 라틴어로 간행한 월간잡지. 완전한 제호는 <예수성심의 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로서 우리말로는 ‘예수 성심지(聖心誌)’란 뜻이다. 처음에는 17cm×22cm 크기의 16면 혹은 20면의 등사판으로 발행되다가 1921년에 가서야 인쇄본이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나자렛인쇄소에서 인쇄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수록된 내용으로는 로마소식, 세계교회소식,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의 소식, 신학교의 소식을 싣는 소식란과 이단 반박의 역사, 토론, 강론지침, 과학란 등의 학문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그 폐간 연도를 1937년경으로 보는 것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1937년 6월호를 폐간호로 본 때문이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용산신학교에서 1935년부터 부록(Supplementum)이란 명칭으로 복간하였는데, 이는 홍콩에서 편집되고 간행되는 <타벨라>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10∼15면 정도로 발간되던 이것 역시 언제 폐간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이 잡지는 무엇보다도 일정(日政)시대의 공백기를 메울 수 있는 교회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타르시치오소년회 [한] ∼少年會
1930년 간도(間島) 용정(龍井)본당에서 창설된 소년단체. 회원들은 주로 미사에 복사(服事)하는 소년들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얼마 뒤 소녀들을 위한 ‘데레사회’가 조직되자 두 단체를 연길교구 내 각 본당으로 보급시키려는 용정본당 주임 랍(Rapp, 朴) 신부의 노력에 의해 교구 단위의 단체로 확대되어 ‘타르시치오소년회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31년 8월 제1차 연합대회가 미사성제를 주제로 간도의 대령동(大領洞)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12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 약 15명이 참가, 공동제헌, 제헌정신의 일치를 통한 청소년의 일치, 성가의 의의, 고대 그리스도교 봉헌예절의 재현 등 소주제를 통해 미사성제의 참뜻을 익혔고 그 뒤 대회장(大會長)이었던 아펠만(Appelmann, 裵) 신부에 의해 회지(會誌) <타르시치오회보>가 간행되었는데 <타르시치오회보>는 1931년부터 4년 동안 간행되다가 <가톨릭소년>으로 발전하였다.
클리어리 [원] Cleary, Patrick
Cleary, Patrick(1896∼1970).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 한국성(韓國性)은 길(吉). 1923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북 의주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번(Byrne, 方) 신부, 모리스(Morris, 睦) 신부와 함께 평양교구 창설을 준비했고, 1927년 평양 교구가 창설된 뒤에는 관후리본당 주임신부, 1928년 마산본당 주임신부, 1931년 중강진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1933년 휴가차 잠시 귀국했다가 돌아와 1935년 중강진본당, 1938년 관후리본당, 1940년 기림리본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기림리본당에서 사목중이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평양교구에서 일하던 메리놀회의 모든 성직자와 함께 일제(日帝) 당국에 체포되어 이듬해 강제 추방되었으나 광복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6.25전쟁 중에는 유엔군을 따라 북진, 수복지역인 원산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하였다. 그 뒤 1951년 신병치료차 하와이로 건너갔고 1952년 다시 미국 본토로 돌아가 생활하다가 1970년 9월 6일 사망하였다.
클뤼니수도회 [한] ∼修道會 [영] Order of Cluny
베네딕토회 수족(修族)의 하나로 프랑스의 클뤼니시에서 910년 창설되었다. 창설자는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으로, 그는 당시 수도원 침체 요인의 하나였던 주교권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시켜, 클뤼니 수도회를 주교의 관할권에서 독립시켰다. 오도(St. Odo) 대수도원장 이후 가장 중요한 개혁 수도회가 되었다. 클뤼니수도회에 의한 개혁을 일반적으로 클뤼니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클뤼니 개혁운동은 수도회 내적으로는 엄격한 베네딕토 회칙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수도생활의 엄격한 규제로 나타났고, 수도회 외적으로는 평신도 임직권, 성직 매매, 사제 결혼에 대한 논쟁에서 교황을 도와 교회정신을 견고하게 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12세기에 이르러 2,000여 소속 수도원을 갖는 커다란 수도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3세기부터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여, 그 이후부터는 시토회(Citeaux)에 개혁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클로이트겐 [원] Kleutgen, Joseph
Kleutgen, Joseph(1811∼1883). 독일의 철학자이며 신학자. 도르트문트에서 출생하여 칼테른에서 별세. 1834년에 예수회에 입회, 1837년부터 1843년까지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강의하였다. 독일의 가톨릭 철학계와 신학계에 스콜라학적 방법을 부흥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 저서는 ≪Die Theologie der Vorzeit≫(3v., Munster 1853∼1860) 및 ≪Die Philosophie der Vorzeit≫(2v., Munster 1860∼1863)이다. 이들 저서는 헤르메스(G. Hermes)와 귄터(A. Gunther) 및 프로샤머(J. Frohschammer)를 비난하고 칸트와 헤겔과 셸링의 철학을 배격하면서 가톨릭 철학과 신학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적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De fide catholica)의 기초작업에 참여하였고 교황 레오 13세의 유명한 회칙(Aeterni Partris, 1879)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가 8권으로 집필할 계획이었던 ‘Institutiones theologicae’는 그 첫 권(De ipso Deo, Regensburg 1818년)의 출간으로 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