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원] Kenya

적도상의 동부 아프리카의 열대 농업국가. 인도양, 탄자니아, 우간다, 수단, 이디오피아, 소말리아 등과 접경하고 있으며, 면적 58만 2,646㎢, 인구 1,786만명이며 그 중 약 355만 4,000명이 가톨릭 신자이다(1982년 현재).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케냐 해안지역을 발견하였으나 조직적인 포교활동은 1844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오면서부터였다. 1953년에 교계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수도 나이로비는 주교구가 되었다. 500명여명 사제 중에서 약 60여명의 아프리카 출신 사제가 있으며, 이들은 국민학교, 중등학교, 가톨릭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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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성당 [영] Cathedral of Canterbury [한] ∼大聖堂 [관련] 성공회

최초의 캔터베리 대성당을 아우구스티노 대주교가 착공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완성하였으나, 1067년에 불에 탔다. 1100년부터 1130년까지 성당 내의 행진과 성인(聖人)들의 유보(遺寶)를 전시하기 위하여 개축하였으나, 다시 1174년에 화재를 입고, 콰이어(choir, 성가대석)는 월리엄의 이름을 가진 영국인과 프랑스인 건축가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다(7411∼1184년).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대주교의 유해와 유류품들이 성당의 ‘성삼위 일체 경당’(Chapel of Holy Trinity)에 모셔져 있다. 교회의 중앙부는 1379년부터 건축가 헨리 이벨르(Henny Yevele)에 의하여 수직선으로 개축되었으며, 종탑(鐘塔)은 1500년경 존 와스텔(John Wastell)이 다시 지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은 영국에서 제일가는 성당이며,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장엄 정교하다. 캔터베리 대성당에는 많은 성인과 대주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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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영] Canterbury

600년경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604 혹은 605)에 의해 창설된 옛날 영국의 중요한 수도대교구(首都大敎區). 그레고리오 대교황에 의해 파견된 그는 교황이 지목한 런던 대신에 국왕 에델버트(Ethelbert)가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가장 강력하고 개화된 앵글로색슨 왕국의 수도를 남부영국의 수도 대교구좌로 선택하였다. 캔터베리는 그 자체가 로마식 도시로서 교계조직이나 건축 등이 로마의 축소판이었다. 캔터베리교구는 동부 켄트와 그 주변부로 구성되어 항상 작았지만 그 관구는 웨일즈를 따라 험버(Humber) 지역에 이르는 전 남부를 포괄하게 되었다.

653년까지 캔터베리는 아우구스티노와 이탈리아인 동료들인 라우렌시오(Laurentius), 멜리토(Mellitus), 유스토(Justus), 호노리오(Honorius) 등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첫 앵글로색슨 대주교로는 프리토나스(Frithonas, 재위 : 655∼664)였고, 테오도르(Theodore, 668∼690) 대주교에 의해 영국교회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802∼803년에 걸쳐 수도 대교구좌로서의 캔터베리의 수위성(首位性)이 교황과 관구공의회에 의해 인정되었다. 9세기 노르만 침입으로 첫순교자인 대주교 성 알페즈(St. Alphege)를 낳았다. 노르만 정복 이후 란프란크(Lanfranc, 1010?∼1089)와 같은 대주교의 지도로 국왕들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수도원 및 교회개혁을 단행하여 다른 수도원들의 귀감이 되었다. 안셀모(Anselmus, 약 1033∼1109) 대주교는, 월리엄 2세 및 헨리 1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으며 클래렌던 헌법에 대한 성 베케트(St. Thomas Becket, 118?∼1170)와 헨리 2세 사이의 논쟁은 결국 전자의 순교를 초래, 캔터베리의 중심적 위치를 확인시켰으며 베케트의 묘소로의 순례여행은 중세에 큰 인기를 끌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한 랭턴(Stephen Langton)의 임명으로 종결된 선거(1205∼1207년)는 영국 교회사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그 이후 성 에드문드(St. Edmund of Abingdon), 보니파시오(Bonifatius of Savoy), 킬와르드비(Robert Kilwardby), 페컴(John Peckham), 로베르토(Robert of Winchelsea) 등의 훌륭한 주교들이 출현하여 라테란(1212년), 1, 2차 리용(1245, 1274년) 등의 개혁 공의회에서의 헌장발표에 크게 기여하였다. 14∼15세기 주로 귀족 출신이었던 대주교들이 교회에 대한 왕권 강화에 힘쓰는 반면에 정치에 간여, 왕의 주요한 반동적 충고자였던 시몬(Simon of Sudbury, 재위 : 1375∼1381) 대주교는 농민봉기 때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6세기 헨리 8세와 가타리나(Catherine of Aragon)의 결혼이 교황에 의해 지지받은 뒤 왕의 앞잡이였던 대주교 크랜머(Thomas Cranmer, 재위 : 1533∼1556)는 교황의 허가를 무효로 선언,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웠으며 이에 따라 모든 수도원과 성당이 폐쇄되고 교구의 장원은 국왕에게 넘겨졌다. 그 뒤 메리 튜더(Mary Tudor, 재위 : 1553∼1558)의 즉위로 로마가톨릭이 부활되고 추기경 폴(Reginald Pole)이 대주교이자 교황대사로 임명되었으나(1556∼1558) 이들의 죽음으로 가톨릭으로의 복귀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는 수위헌장과 기도방식 통일법령을 부활시켰으며 캔터베리는 영국 성공회의 사령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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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원] Carroll, George

Carroll, George(1906∼1981).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몬시뇰. 7대 평양교구장서리. 한국성(韓國姓)은 안(安). 미국 뉴욕에서 출생하여 1931년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한국의 선교사로 자원 이 해에 한국에 입국하여 메리놀회가 관할하던 평안도 지방의 마산(馬山), 안주(安州), 서포(西浦) 등지에서 10여년간 사목하였다. 서포본당 주임신부 재직 때인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당국에 체포, 구금되어 이듬해 6월 메리놀회 전 성직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그 뒤 버팔로 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광복이 되자 이듬해 가톨릭구제회(N.C.W.C)의 한국지부장으로 입국,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 1950년 6.26동란이 일어나자 잠시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군종신부로 입대하였고 이해 11월 7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1951년 안양에 문둥병 환자촌인 성 라자로 마을을 세웠고 1953년 휴전이 되면서 평양교구가 침묵의 교회로 되자 한국 가톨릭 구제회를 중심으로 나사업을 비롯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 그 공로로 1954년 보사부장관 표창, 1961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75년 신병으로 평양교구장 서리를 사임하고 귀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휴양 중 1981년 9월 6일 메리놀회 본부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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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영] Canada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위치하는 영연방 국가. 면적은 997만 6,139㎢, 인구는 2,463만명(1982년 추계)이다 캐나다의 역사는 1608년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시기부터 시작되었으며, 동북부의 허드슨만, 세인트 로렌스 강하구에서 시작된 식민지 건설을 유럽 각국에서 이주해 온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의 선교는 예수회,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시작되었고, 1649년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759년 이후 캐나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은 이 지역을 ‘프로테스탄트화’ 하기 위해 가톨릭을 탄압하였다. 1774년 영국은 가톨릭 교도들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가톨릭의 ‘관용령’을 선포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그 뒤 교회제도를 정비하였고, 원주민에 대한 선교에도 힘썼다. 현재 캐나다 국민의 45%인 약 1,087만 4,000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며 74개의 교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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