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조약 [한] 政敎條約 [라] concordatum [영] concordat [독] Konkordat [프] concordat [관련] 교회와

하느님에게 봉사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교회와 국민적이고 정치적 권한에 기초한 국가는 독립적인 2개의 최고권(最高權)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순교회적 사항’(純敎會的事項, res mere ecclesiasticae)을 관장하고, 국가는 ‘순국가적 사항’(res mere ecclesiasticae)을 관장하지만, 교회권과 국가권 모두에 관계되는 ‘혼합사항’(res mixtae)이 있어, 이를 관장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하기가 상당히 곤란할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교회권과 국가권은 종종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권과 국가권의 최고권자들이 맺는 계약이 정교조약이다.

정교조약은 ① 보름스(Worms)의 콘코르다툼(1121년)과 같이 이해 당사자들이 공동선포한 법령의 형식, ② 체결된 내용을 먼저 교황대칙서로서 선포하고 국법으로 공포하는 형식, ③ 이해 당사자에 의해 기초 · 조인(調印)된 원안(原案)을 비준 · 공포함으로써 법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 ④ 그 외 비공식적 협정(modus vivendi) 등이 있는데, ③이 가장 일반적이다. 정교조약의 체결권은 교회측에서는 교황, 또는 지속적 권리주체인 교황청이 되고(교회법 225조) 국가측에서는 헌법에 따라 원수(元首), 또는 정부가 된다. 정교조약은 교황특권설(Privilegientheorie), 국가양보설(國家讓步設, Legaltheorie)이 대립되지만 조약설(條約設, Vertragstheorie)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고 국제법상으로도 협상으로 간주한다.

정교조약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중세에는 교회의 기본입장이 유럽에 있어서 대체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정교조약도 크게 많지 않다. 최초의 정교조약은 서임권 분쟁을 둘러싸고 1121년 교황 갈리스도(Callistus)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1081∼1125) 사이에 맺은 보름스조약이다. 여기서 서임권은 교황과 국왕 양자의 이해 속에서 처리되었다. 대체로 역사상 중요한 정교조약들은 다음과 같다. 1515년 교황 레오(Leo) 10세와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 사이에 맺은 조약으로 서임권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기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그 뒤 1801년 교황 비오(Pius) 7세와 나폴레옹 1세 사이에 다시 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서임권, 교회재산은 국가에 양보하고, 프랑스정부는 가톨릭을 국가적인 신앙으로 인정하였다. 이 조약은 1905년 폐기되고, 정교분리가 확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격렬한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폴란드(1925년), 루마니아(1927년), 이탈리아(1929년), 바덴(1932년), 오스트리아 및 독일(1933년) 등 다수의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1929년 라테란 조약에 의해 로마문제가 해결되고, 주권국가로서 바티칸시국이 인정되었다.

정교조약은 교회와 국가의 이해가 공통적으로 관철되는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의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양 이해 당사자들은 서로의 입장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리증진을 이룩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회와 국가, 서임권논쟁

[참고문헌] A. Mercati, Raccolta di Concordati(1908∼1914), Roma 1919 / J.M. Restrepo, Concordata inita, Roma 1934 / M. Bierbaum, Das Konkordat in Kultur, Politik und Recht, Freiburg, 1928.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분리 [한] 政敎分離 [라] separatio status ab ecclesia [영]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

근대국가의 헌법에서 나타나는 기본원리의 하나로 교회와 국가가 서로 자기의 고유한 활동영역을 지키는 한 상호 간섭하지 않으며 국가는 어느 특정한 종교나 교파에만 특권이나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어떠한 신앙에 대해서도 동등한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 이것은 절대권적이었던 교권에서 국가와 개인의 해방임과 동시에 종교를 국가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취지 아래 시행되었다. 즉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려거나 국가가 종교단체의 활동 및 개인이나 신앙행위에 부당하게 간섭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국가의 출현에 따라 국가와 교회는 자주 충돌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또한 국가가 특별한 교파에 편들어 종교전쟁을 유발케 하기도 하였다. 정교분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실현되었다. 최초의 정교분리는 영국의 식민지 당시 미국의 로드아일랜드(1636년), 펜실베이니아(1682년)에서 시행되었고, 1787년 헌법에 의해 미국 전체에 확장, 적용되었다. 미국의 정교분리는 모든 교파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했고, 종교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와는 대조되는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대혁명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자연 반교회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억압하기 위해 확립한 것으로 교회에 대핸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각국은 다투어 정교분리의 원칙을 채택하였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국가든 그 형태는 달리하지만 정교분리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자칫하면 지배자 이데올로기의 이용물로 전락할 위험을 갖고 있다. 즉 지배층은 체제유지를 위해 종교의 통합기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대중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뜨지 못하게 하고, 현실의 고통을 종교의 통합적 기능 속에 수렴하여 와해시키면서 현실의 모순과 부정을 그대롤 온존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에 의해 종교가 이용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정교분리에 대해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교회가 정치에 직접 간섭함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을 파기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현대교회는 끊임없이 지상의 평화를 가로막는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사목헌장 77) 전쟁의 온상인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함을 강조하였다(사목헌장 83). 교황 바오로 6세도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기아에 울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빈곤에 허덕이는가 … 국가나 개인의 낭비, 허영심에 가득 찬 지출, 군비경쟁은 무엇인가. 교회는 아직도 굶주리고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는 형제들의 운명에 무관심한 수 없다”(회칙 53, 74)고 강조하며 교회의 사회참여를 역설하였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실제에 있어서 지켜지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교의 이상적인 관계는 완전한 분리보다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6세를 위시하여 역대 교황들도 완전하고 철저한 정교분리를 배척하였다.

[참고문헌] Dawson, Religion and the Modern State, 1935 / Bates, Religion liberty, 1945 / Gutierez, A theology of Liberation(성염 역, 해방신학, 197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1982.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교봉포 [한] 正敎奉褒

중국인 학자 황백록(黃伯錄, 1830∼1909)이 저술한 중국천주교회사. 1884년 상해의 자모당(慈母堂)에서 2책(冊)으로 초간되었고 1894년 중간되었다. 초간본에서는 중국천주교회사에 대한 162항의 조목이 수록되었으나 중간본에는 5개항의 조목이 더 첨가되어 있다.

인물위주, 특히 서양선교사들의 전교활동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는데 중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당조(唐朝)에서부터 청조(淸朝)까지의 중국천주교회사가 당 · 원 · 명 · 청조(唐 · 元 · 明 · 淸朝)로 나뉘어 서술되어 있고 부록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선교사 108명의 이름이 라틴어와 한자어로 함께 표시되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광수 [한] 鄭光受

정광수(?∼1801). 순교자. 세례명 바르나바. 여주(驪州) 출신. 1791년 양근(楊根)의 권일신(權日身)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5년 서울 벽동(碧洞)으로 이사하여 황사영(黃嗣永), 김건순(金健淳), 홍익만(洪翼萬) 등과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801년 2월 30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여주로 이송되었다가 1801년 12월 26일 그곳에서 그의 아내 윤운혜(尹雲惠)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누이 정순매(鄭順每)는 그보다 앞서 5월 22일 같은 곳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바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정경 [한] 正經 [관련] 정전

⇒ 정전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