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원] Indonesia

동남 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 3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이다. 면적은 190만 4,569㎢, 인구는 약 1억 5,303만명(1982년 추계)이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네덜란드령 동(東)인도였으나 1945년 8월 17일 독립하여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스도 교도는 36만 3,000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며, 34개의 교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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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한] 印度 [원] India

아시아 대륙의 남부 히말라야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대륙의 반도. 면적은 329만km2, 인구는 약 7억 1,160만명(1982년 추계)이다. 50년경 사도 토마스에 의해 처음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포르투갈이 고아를 동방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으면서부터였다. 1500년에 프란치스코회가 인도에 들어왔고 이어서 예수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이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 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자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는 이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는 포르투갈인을 통해 선교하던 형태를 지양하고 직접 선교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현재 인도에는 110개의 교구가 있으며 1,220만명(1982년 현재)이 가톨릭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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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시오 [라] Innocentius

Innocentius, 1세(?~417). 교황(재위 : 401~417). 이탈리아 알바노 태생. 고대 교황 중에서 가장 유능한 교황의 한 사람이며, 교황권의 확대 강화를 꾀하였다. 로마교회는 사도 베드로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므로 모든 교회가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첫째로, 지방교회 회의에서 파면당한 성직자(聖職者)도 교황청에 상고(上告)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오크회의(403년)에서 파면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ysostomus)의 상고를 수리(受理)하여 그를 옹호하였다. 둘째로, 교황에게는 새 교회직무를 창설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 데살로니카의 부주교(副主敎)를 교황 대표자로 지정하였다. 셋째로, 교리에 관한 최종결정권을 교황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이단(異端)인 노바시아누스주의를 억압하고, 또한 로마황제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도나투스파(派) 금지령(404년), 마니교도 · 몬타누스주의 · 프리실리아누스파(Priscillianism) 금지령을 반포케 하였다. 또한 펠라지우스(Pelagius) 배격에 관한 카르타고회의의 결의에 허가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서(西)고트왕 알라리쿠스(Alaricus)와 로마황제를 화해시키려고 수도 라벤나에서 교섭 중에 있을 때 로마는 알라리쿠스에게 공략당했는데(410년), 이것은 이교 로마에 대한 신(神)의 심판으로 간주되어, 교회는 그 후에 오히려 융성하게 되었다.

Innocentius, 3세(1160~1216). 교황(재위 : 1198~1216). 원명 Giovanni Lotario de Conti. 트라스문드 백작의 아들. 교황 글레멘스 3세의 조카. 이탈리아의 아냐니 태생. 로마, 파리, 볼로냐에서 공부하고, 글레멘스 3세의 서거로 추기경이 되었다(1190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뒤를 이어 37세의 나이로 교황이 되어 18년간 절대적 권위를 떨쳤다. 성 그레고리오 7세(재위 : 1073-1085)의 교권 절대주의사상을 이어받아 세속군주 및 국가를 억누르고 교황청의 강화를 꾀함으로써 교황 정치는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또한 교황령의 실지 회복에 힘써 루마니아지방을 교회직할로 하고, 안코나, 토스카 등지도 그 소속령으로 넣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한 최초의 교황이며,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도 지배할 권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그 이념에 입각해서 전체 유럽 여러 나라의 국정에 간섭하였다. 즉, 독일황제의 황제위를 둘러싼 분쟁 때(1198년), 황제의 선거권은 각 선거후에게 있으나, 교황은 ‘선출된 사람을 조사할 권리와 권위’(ius et auctoritas examinan야 personam electam)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오토 4세를 도와서 그를 로마에서 대관(戴冠)케 하였다(1209년). 그러나 오토 4세가 교황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령(領)을 요구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자신의 피후견인(被後見人)인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앉혔다(1215년). 또한 프랑스왕 필립 2세의 이혼문제에 간섭하여 이혼한 왕비 덴마크의 잉게보르크의 복연(復緣)을 강제로 실현시켰다(1200년). 또 자기가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 랭튼(Stephen Langton)을 거부한 영국의 존 왕을 파문(1213년),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케 하고 신종을 맹세케 한 다음 그 죄를 용서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발칸, 키프로스, 아르메니아에까지 미쳤으며, 유럽 전체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여러 권력위에 교회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제4차 십자군(1202-1204년)을 추진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그리스에서 탈환(1204년),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를 개최하여 발두스파(派) 및 알비파를 배격, 프란치스코회 및 도미니코회의 창립을 공인(公認), 구(舊)수도회를 개혁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회의 수령으로서 교황의 위치가 확립되어, 교무(敎務)와 정무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정의의 왕’ 즉 멜키세덱으로 상징되는 왕인 제사(祭司)의 이념을 실현시켰으며,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초래하였다.

Innocentius, 4세(?~1254). 교황(재위 : 1243~1254). 1200년 제노아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교회법 교수로 명성을 얻었다. 1227년 추기경이 되었고, 1243년 약 18개월간의 공위(空位) 기간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위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분쟁의 최정점을 기록하였다. 즉위 즉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자, 1245년 리용 공의회에서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1254년 콘라드(Conrad) 4세의 사망 후에 비로소 교황과 제국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재위기간 중 루도비코 9세에 의해 영도되는 새 십자군(1248년)을 소집하여 타타르족에게 공격받는 동로마제국을 위해 몽고제국의 칸(Khan)에게 사절을 파견했으며(1245년) 그리스 정교회와 협상을 벌여 그의 생전에 동방이교(離敎)가 종식되는 듯이 보였다. 또한 누미디아(Numidia)와 이디오피아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대칙서 (1252년)에서 이단심문시의 고문을 허가하기도 하였다. 그가 쓴 ≪교령집에 대한 주석≫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Innocentius, 10세(1574~1655). 교황(재위:1644-1655). 원명 Giovanni Battista Pamfili. 로마 태생. 교황청 요직을 역임, 추기경을 거쳐 우르바노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자 교황청에서 바르베리니(Barberini)가(家) 세력을 몰아냈다. 포르투갈의 독립을 반대하고, 베스트팔리아의 화약(和約)에 항의하여 교회재산의 보전에 힘썼으며, 터키인(人)의 공격에 대해 베네치아를 도왔다. 또한 대칙서(1553)를 발표하고, 얀센(C.O. Jansen)의 ≪아우구스티누스≫ 속의 5개 주제(主題)를 비난하여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의 얀센주의 논쟁을 촉진시켰다. 1645년 중국에서의 적응주의를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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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한] 忍耐 [라] patientia [영] patience

일반적으로 인내는 현재의 재난이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인내는 다른 모든 덕을 성취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현재의 악(惡, evil)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하느님의 뜻대로, 슬퍼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덕행이다. 특히 용덕(勇德)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인간이 자연적인 선(善)과 덕(德)을 얻기 위해서 현재의 곤란을 참게 하는 인내는 성취되어지는 덕이다. 이에 비해 성화은총(聖化恩寵)은, 성화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픈 열망에서 고난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견디게 하는, 초자연적인 인내를 불러일으킨다. 이 초자연적 인내는 참된 기쁨을 준다. 성인(聖人)들은 인내로 인해 가장 높은 정도의 기쁨을 맛보았다.

인내는 성서에 사용된 두 측면의 인내를 근거로 한다. 즉 ‘자기 억제’([그] makrothnmia)와 ‘적극적으로 참고 견딤’([그] upomone)이다. 전자는 자제하여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자비와 연민과 관계되며 하느님과 인간과의 양자에 해당된다.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시며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출애 34:6)으로 인간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시다(시편 78:38-39, 103:8, 지혜 11:23, 12:8-10, 로마 2:4-5, 1베드 1:6). 또한 전자의 인내는, ‘성령의 열매’(갈라 5:22)로 믿음을 정화시키고(1베드 1:6) 희망을 길러주며(로마 8:25, 15:4) 완덕으로 이끄는(야고 1:4) 것으로 특히 하느님의 일꾼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인내를 권고하였다(1디모 6:11, 2디모 2:24, 3:10).

이에 비해 후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강조되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구약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의 희망’(예레 14:8, 17:13)이라 불려졌고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고통을 견디는 인내만이 인간의 삶을 열매맺게 할 것이라 하였다(루가 8:15). 그래서 성 베드로는 부당한 고통도 견디라고 권고했고(1베드 2:19-30), 성 바울로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기뻐하였다(로마 5:3, 1고린 4:12, 2고린 1:6). 현세에서 신자들의 삶은, 위대하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복된 희망의 날(디도 2:14)을 기다리는 인내의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참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10:22).

인내는 보편적이고 겸손하며 초자연적이라는 세 특성을 갖는다. 즉 인내는 어떤 이유에서 생겨나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모든 종류의 악을 견딘다. 인내는 부당함을 불평하거나 관심과 동정을 구하지 않을 때 겸손하다. 인내는 애덕으로 성취돌 때 초자연적이다. 한편 인내에 반대되는 것은 ‘무감각증’과 ‘참지 못함’이다. 전자는 감정의 부족을 말하며 자신과 타인의 고토에 냉담하게 만든다. 후자는 덕의 성취에 필수불가결한 곤란을 참는 것을 거절하여, 외적으로는 분노와 불평, 좌절 등으로 나타나며 내적으로는 시련에 대한 반감과 지나친 자기 방어로 나타난다. 이 두 악덕(惡德)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하여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전주곡이 되는 고난과 슬픔을 회피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내는, 내적 불평 없이 곤란을 견디는 것, 곤란을 덕의 진보로 사용하는 것, 하느님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열망하여 영신적 기쁨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 등의 세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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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선언 [한] 人權宣言 [영] Declaration of Human Rights [관련] 인권 양심선언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 평등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강자나 지배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공동선을 저버림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권리를 억압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저항의 역사이고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포된 문서들을 인권선언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인권선언은 1215년 영국에서 발표된 <대헌장>(Magna Carta)이다. 이것은 당시 귀족들이 국왕의 전제적 지배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서 일반 민중들의 권리를 주장한 것은 아니나 인권을 위한 강력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1628년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도 당시 영국 국왕의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기본적 인권이나 천부적 인권을 선언한 것은 아니고, 오직 국왕의 폭정을 시정하기를 원하는 청원에 불과하였다. 1689년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은 대헌장이나 권리청원에 비하면 상당히 민주적 성격을 띤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명예혁명을 합리화하는 데 그쳤다. 인간의 권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기본적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리를 처음으로 밝힌 것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이다. 독립선언은 첫머리에서 인권은 하느님이 준 신성한 것으로 불가양도성과 절대성과 최고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인간의 기본권리로서 자유, 생명 및 행복의 추구를 들었다.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은 미국의 독립선엄보다도 더욱 건전한 선언이었다. 여기에서는 자유 · 평등 재산 및 압제에 대한 반항을 기본적 인권으로 주장하면서 사상 ·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도 주장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1919년의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인권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인권선언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체계적인 것은 1948년의 유엔의 세계 인권선언이다. 이 선언은 전문과 30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첫째,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하고 노예의 금지, 고문, 비인도적 대우의 폐지, 사상 · 양심 · 종교의 자유, 집회 · 결사 · 표현의 자유 등을 강조하였고, 둘째로는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권리로서 사회보장, 노동권, 휴식권, 여가의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을 규정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볼 때 인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였다. 그 이전에 있어서는 교회는 인권문제를 세속적 문제로 간주하여 도외시하거나 외면하는 일이 많았고 심지어 인권선언을 배격하는 일도 있었다. 1891년 레오 13세는 역사적인 회칙인 <노동헌장>(Rerum Novarum)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최초의 인권선언이었다. 이 회칙은 요한 23세가 사회재건의 대헌장이라고 말하였듯이 인간의 권리 특히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레오 13세는 노동자가 일할 권리, 공정한 임금을 받을 권리, 적당한 휴식을 취할 권리, 여자와 어린이가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들을 선언하였다.

비오 11세는 1931년 <사회재건 대헌장>(Quadragesimo Anno)을 발표하여 정치권력은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고 1937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관한 회칙(Divini Redemptoris)에서는 인간의 생존권, 생존에 필요한 수단과 함께 육신적 독립을 누릴 권리, 하느님의 뜻대로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권리, 자유로운 결사의 권리, 자유롭게 재산을 소유하고 또 사용할 권리, 결혼과 가정형성의 권리 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회칙에서 양심의 권리, 교육의 권리, 인종차별의 폐지 등을 역설하였다.

비오 12세는 많은 메시지를 통하여 신체, 지성, 지덕의 생활을 유지 발전시킬 권리, 결혼 및 결혼목적에 도달할 권리, 종교교육을 받을 권리, 예배 및 종교활동의 권리, 가정을 영위할 권리, 노동의 권리, 신분을 자유선택할 수 있는 권리, 자기의 의무 및 사회적 제약을 자각한 재산 사용권, 진리를 추구할 권리, 결사의 권리, 참정권, 법의 보호를 요구할 권리, 행복을 누릴 권리 등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하였다.

1947년 2월 1일의 N.C.W.C의 인권선언은 전문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내려주신 법을 준수하여 살 의무를 부과한다. 따라서 인간은 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권을 선언하였다. 범죄로 인한 정당한 처벌을 제외한 생명과 육체보존의 권리,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하느님을 숭배할 권리, 종교단체를 조직할 권리, 정당한 법 아래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 성별 · 국적 · 인종 · 종교에 관계없이 법의 균등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진리와 정의에 입각하여 정보와 의사를 자유스럽게 발표할 권리, 결혼이나 이혼 및 평신도나 성직자의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 · 유지할 수 있는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유지 및 향상에 적합한 교육을 받을 권리, 불편한 점을 시정하도록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자유스런 국적 취득의 권리, 필요한 경우에 이주를 통하여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 권리, 결사와 평화스러운 집회의 권리, 노동과 직업선택의 권리, 사유재산 소유권, 일반복지를 위해서 사유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리,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경제정의와 일반복지를 누리기 위한 직업단체 조직의 권리, 개인이나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사회나 국가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권리, 단체교섭의 권리 등이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인 사목헌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기본적 인권은 의 · 식 · 주 및 신분선택의 자유와 가정형성의 권리, 교육과 노동에 대한 권리, 명예와 존경에 대한 권리, 정당한 보도를 들을 권리,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할 권리,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종교적 분야까지 포함해서 정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이다. 1963년에 발표된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는 생존과 품위있는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 도덕적 및 문화적 가치에 관한 권리, 올바른 양심에 따른 신앙의 권리, 신분선택의 자유에 관한 권리, 경제생활에 관한 권리, 집회와 결사의 권리, 이주의 권리, 참정권 등을 가장 기본적 인권으로 강조하였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1975년 발표한 ≪교회와 인권≫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본적 인권을 선언하였다. (1) 모든 사람은 그 고귀성과 품위와 본성에 있어서 평등하다. (2) 사람은 누구나 같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3) 인간의 인격적 권리는 불가침이고 불가양도이며 보편적이다. (4) 사람은 누구나 생존권, 신체의 보존 및 건강을 누릴 권리, 인간 품위에 알맞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할 권리, 즉 의 · 식 · 주 생계수단 그 밖의 사회보장에 불가결한 것들을 보유할 권리. (5) 누구나 합당한 호칭과 존경을 받을 권리. (6)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7) 거짓 없는 보도를 들을 권리. (8) 양심에 따라 행동할 권리. (9) 진리를 탐구할 권리. (10) 신앙과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권리. (11) 종교의 자유. (12) 법 앞에서의 평등. (13) 결사의 권리. (14) 결혼과 가정의 권리. (15) 공적인 일에 참여할 권리. (16) 일할 권리. (17) 교육을 받을 권리. (18) 사유 재산권. (19)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권리. (20) 이주의 권리. (21) 남녀 평등권. (22) 부모의 자녀 교육권. (23) 노인과 어린이, 병자와 버림받은 사람이 신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 (24) 투표권. (25) 합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26) 노동자의 파업권. (27)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사유재산을 제약할 수 있는 권리. (28) 문화의 혜택을 받을 권리. (29) 소수 민족의 권리. (30)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31) 반체제 인사의 권리.

마리탱은 그의 저서에서 자기 결정권, 인간생활의 완성을 추구할 권리, 영원법을 추구할 권리, 연구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재화소유권, 결혼권, 가정형성권, 결사권, 인격을 존중받을 권리, 노동자의 경영참여권, 노동권, 직업선택권,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저항권 등을 기본적 인권으로 열거하였다.

위에서 적은 문헌 이외에도 요한 23세의 <어머니와 교사>(1961),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1967), <레룸노바룸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1971), <세계 안의 정의>(1971), <평화를 위한 정의의 활동>(1972), <인권과 화해>(1974) 등의 교회문서는 인권에 대한 강력한 선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인권선언의 정신은 1960년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한국 교회에서도 강력하게 선포되었다. 1968년 강화도에서 가톨릭 노동운동이 탄압을 받았을 때 주교단과 교회단체에서는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냈고, 1972년 8월 9일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인권옹호에 관한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1974년 7월 지학순(池學淳) 주교가 정부기관에 연행되자 인권을 위한 많은 기도회가 열리면서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유,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해서 강력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74년부터 시작된 동일방직사건에서 한국가톨릭 교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전폭적으로 헌신하였고 1978년 함평 고구마수매사건에서도 주교단을 비롯한 많은 교회단체에서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또 1975년 교황청의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가 한국주교단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많은 인권유린사건에 개입하여 약한 자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76년 12월 13일의 인권선언문은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지학순 주교, 최기식(崔基植) 신부, 김지하(金芝河), 오원춘(吳元春) 등이 발표한 <양심선언>은 인간의 권리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권리임을 입증하였다.

요컨대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안전과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릴 권리와 의무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교회는 인권유린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복음에 입각한 인권선언을 발표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인권선언을 단지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적 차원에까지 넓혀야 한다. 특히 오늘날의 세계는 강대국과 약소국,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적 불균형이 극심하다. 따라서 후진국이나 약소국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인권선언의 한 부분이 된다. 요한 23세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듯이 교회 밖에서 발표되는 인권선언들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사회정의를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고 거기에 대한 많은 문헌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긴요한 것은 인권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투쟁이다. 그 이유는 인권이 유린된 곳에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으며 교회의 사명 중에서 인권의 수호와 신장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드높임으로써 모든 인류의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현세적 구원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 인권, 양심선언 (韓庸熙)

[참고문헌]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교회와 인권, 분도출판사, 1975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명동천주교회 200년사, 한국 가톨릭인권운동사, 1984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1부 제1장 / 동아일보사, 세계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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