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홍 [한] 金洋洪

김양홍(1874~1945). 신부. 초대 전주(全州) 교구장. 세례명 스테파노. 1900년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전북 진안(鎭安)의 어은동을 근거로 전북 장수(長水), 남원(南原), 무주(茂侏), 용담(龍潭) 등지의 18개 공소를 맡아 사목과 전교에 힘썼다. 1931년 전라도 지역이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자 감목대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7년 전남 지역이 광주(光州) 지목구로, 전북 지역이 전주(全州)지목구로 설정되자 전주지목구장에 임명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방인 교구장이 되었다. 전주지목구 설정 당시의 교세는 신부 14명, 교우수 1만 7,527명, 성당 36개, 공수 190개로 이는 모두 김양홍 신부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1941년 일제의 탄압과 노령으로 인해 벅찬 교무행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해 11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석동(石洞)본당에서 잠시 사목하다가 이듬해 광주교구로 이적되어 나주(羅州)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중 1945년 5월 3일 72세로 사망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아기 [한] 金阿只

김아기(1790~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결혼 후, 장년에 이르러 친정 언니의 권면으로 늦게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여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신문 중에 “나는 오직 예수 ·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는 한 마디로 신앙을 고백한 후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형조로 이송되자 형조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 마리아밖에 모르는 아가다가 왔다고 반겨 맞아 주었다. 그 뒤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代洗)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시우 [한] 金時佑

김시우(1781~1815). 순교자. 세례명 알렉스. 충청도 청양(靑陽) 출신. 반신불수의 몸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지였으나 신앙만을 굳게 지켜 신자의 본분을 지켰음은 물론,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1814년 부활절 날, 배교자의 밀고로 노래산(老來山)의 교우들이 잡혀갈 때, 자기를 병신이라고 해서 잡아가려 하지 않자, 눈물로 호소하여 함께 잡아가기를 간청하였다.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그는 오히려 창조주의 존재, 강생과 상선벌악(賞善罰惡)등 중요한 신조를 웅변으로 설교하여 관원들도 그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감사(監司)는 다시 말을 못하도록 턱을 부수는 고문을 자행하면서까지 그의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1815년 34세로 옥사, 동정(童貞)과 순교의 두 가지 영광을 함께 얻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순성 [한] 金順性

김순성(?~1862). 천주교 배교자. 밀고자. 세례명 요한. 일명 여상.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유다로 불린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치열해지자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박해를 이용,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 지도급 교우들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을 밀고, 처형케 했고, 앵베르(Imbert, 范世亭) 주교의 하인 정화경을 속여 앵베르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를 체포하게 하였다. 교우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참석, 교리문답과 성서를 읽으며 모범을 보이는 체하면서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공정을 염탐하였고, 또 자신의 밀고에 의해 체포된 처녀 교우들을 농락하려고 하였다. 앵베르 주교 체포의 공로로 오위장(五偉將)의 관직을 얻었으나 1840년 죄인으로 몰려 전라남도 신지도(新智島)로 유배되었고, 1853년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1862년 이재두(李載斗) 등과 공모하여 중종(中宗)의 후손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하전(李夏銓)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 이해 7월 18일(음)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으로 참수(斬首)되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수환 [한] 金壽煥

김수환(1922~ ). 서울 대교구장. 대주교. 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여 1941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 과정, 성신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도일(渡日), 조오찌(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고 이 대 동남아 일대에서 여러 번 사선을 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성신대학(聖神大學)[가톨릭대학의 전신]에 입학, 사제수업을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대구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경북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장, 1955년 경북 김천본당 주임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원을 역임한 후 독일 뮌스터(Munster)대학에 유학, 동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29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하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고 이듬해 3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산 펠리체(Titolo di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ella) 명의 추기경으로 서임식을 가졌다. 그 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위원장을 역임하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미국 노트르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0년 과도정부의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보수적인 주교단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현실과 노동문제에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인권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로,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적 권익으로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교회는 이러한 공동선의 추구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후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한국 천주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고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종교로서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구중서, 대화집 : 김수환 추기경, 지식산업사, 1981.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