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박 [한] 金世博

김세박(1761~1828). 순교자. 세례명 암브로시오. 관명(冠名)은 언우.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金範禹)의 친척으로 한국교회 창설직후 입교했고 입교 후 아내와 자녀들의 천주교 배척으로 집을 나와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회서적을 베껴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가는 곳마다 외교인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아름다운 덕행과 부지런한 기도, 극기하고 청빈한 생활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와 1815년 을해(乙亥)박해를 모면했으나 1827년 정해(丁亥)박해가 일어나 자신이 머물고 있던 안동(安東)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이해 5월(음력)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자수, 1개월 동안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내고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대구감영에서도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박보록(朴保祿), 박사의(朴士義) 부자(父子), 이재행(李在行)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하던 중 1828년 10월 27일(음력) 대구감영에서 옥사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성학 [한] 金聖學

김성학(1870~1938). 신부. 세례명 알렉시오. 평남 순천군 은산(殷山)의 교우가정에서 출생. 어려서 가족과 함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랑, 경기도 이천(利川)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였다. 1883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4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던 중 한국에 신학교가 새로 설립됨에 따라 1892년 귀국,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897년 12월 18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藥峴聖堂, 현 중림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가족들이 살고 있는 황해도 매화동(玫花洞)에서 6개월을 머무른 후 1898년 경북 가실(현 칠곡)본당 주임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했고, 1901년 김천본당으로 전임, 그 곳에서 10년 동안 사목하면서 김천지방 천주교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1911년 황해도 장연(長淵)본당 주임신부, 1916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라틴어교수를 역임하고, 1922년 평양본당(관후리본당)으로 전임되어 14년간 평안도의 여러 지방을 사목하였다. 1936년 충남 공세리본당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던 중 1938년 9월 8일 뇌출혈로 선종, 공세리 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성임 [한] 金成任

김성임(1787~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마르타. 경기도 부평(富平) 출신으로 결혼에 실패한 후 상경, 장님 점쟁이와 재혼했고, 이 때 시집식구의 한 사람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남편이 사망하자 미신을 끊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집을 떠나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천한 일과 궂은 일을 하는 가운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났을 때 이매임(李梅任)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 · 이영희(李英喜) 자매, 김누시아(金累時阿) 등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에서 5차례의 주뢰형을 받아 다리와 팔을 쓰지 못했으나 견뎌 냈고 형조에서 다시 한 차례의 형문을 이겨 낸 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성우 [한] 金星禹

김성우(1795~1841).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안토니오.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의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년에 이르러 양친을 여의고 서울로 이주,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집을 공소로 개조하고 교우들을 돌보며 신부를 보필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는데,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이겨났고, 오히려 옥(獄)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며 함께 갇힌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 그 중 2명을 입교시켰다.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도를 맞은 후 이튿날인 4월 29일 1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김사집 [한] 金~

김사집(1745~1802).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德山) 베방고지[菲芳]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청주(淸州)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과거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공부했으나 천주교가 들어오자 곧 입교, 그 후로 세속영화를 위한 학문을 버리고 오직 기도와 독서에 전념하였다.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교회서적을 베껴 나누어 주며 무지한 교우들과 외교인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1901년 신유(辛酉)박해 대 그가 베낀 많은 교회서적 때문에 체포되어 청주에서 교향인 덕산관아로, 덕산관아에서 다시 해미진영(海美鎭營)으로 이송되면서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1802년 1월(음 1801년 12월) 해미진영에서 청주병영(淸州兵營)으로 이송된 뒤 사형선고를 받아 1802년 1월 25일(음 1801년 12월 22일) 청주 장터에서 곤장 81도를 맞고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