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일(?~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경기도 출신으로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살았다. 1815년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5명의 마을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이송된 후 그 곳에서 옥사하였다.
김사건 [한] 金思健
김사건(?~1839).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중인으로 충청도 서산(瑞山)출신. 1815년 을해(乙亥)박해를 피해 큰아버지 김강이(金綱伊), 아버지 김창귀(金昌貴)와 함께 경상도 머루산으로 피신해서 살고 있던 중, 하인의 밀고로 함께 잡혀 안동 진영에 수감되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순교하고, 아버지는 보성으로 유배되었으나, 그만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었다. 1827년 정해(丁亥)박해로 다시 체포되어 상주(尙州)진영으로 압송, 모진 고문을 받다가 다시 대구, 전주 등 감옥으로 끌려 다닌 끝에 기해(己亥)박해 때인 1839년 5월 26일(음 4월 14일)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80.
김범우 [한] 金範禹 [관련] 을사추조적발사건
김범우(?~1786).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84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李檗)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1785년 봄 명례방(明禮坊, 현재의 明洞)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3형제 및 권일신(權日身) 등과 함께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관리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교우들은 모두 명문의 양반들이라 형조로부터 훈방되었으나 김범우만은 그대로 갇혀 온갖 형벌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끝에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 형조에서 받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김범우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현 을지로 2가 명동성당 부근)은 한국 천주교회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장소가 되었다. 김범우가 체포된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 한다. (⇒) 을사추조적발사건
김백순 [한] 金伯淳
김백순(?~1801). 순교자. 세례명 미상. 김건순(金健淳)의 종형(從兄).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입신출세를 위해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는 가운데 선열(先烈)들의 철학서(哲學書)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책 속에 모순된 점이 많음을 깨닫고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논리(論理)를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學說)로 친구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서교(西敎)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평을 듣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천주교를 연구하여 마침내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입교한 사실을 알자 그의 외숙(外叔)은 그의 마음을 돌려 배교케 하려고 의절을 선언했으나, 그는 외숙과 의절은 할지언정 배교는 하지 못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1801년 3월 26일 배교자의 밀고로 의금부에 수감되어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지 못하고 한때 배교했으나 곧 전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1801년 5월 11일(음 3월 29일)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