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아프리카의 연방국가. 면적 92만 3,768㎢에 인구 약 8,239만명(1982년 추계)이며, 기니아만, 디오메, 니제르, 차드, 카메룬과 접경하고 있다. 15세기에 포루투갈인들이 해안 지방에 그리스도교를 포교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이 있었다. 1950년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으며, 1964년 현재 3개의 대교구, 15교구 4개의 지목구가 있다. 가톨릭 신자는 약 589만명(1982년 현재)이며, 가톨릭 학교, 병원 등을 운영하며, 가톨릭계 주간지도 있다.
나선소자전 [한] 羅鮮小字典 [라]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
최초의 나한자전(羅韓字典). 1891년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나자렛인쇄소에서 한국 신학생들을 위해(Ad usum studiosae juventutis Coreanae) 간행하였다. 저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로 전해지지만 그를 이 소사전의 유일한 저자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병인박해(1866년)에서 살아남은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2명의 신부들이 그들의 선임자인 순교자들이 일한 것을 부분적으로 다시 살려 《한불자전》(韓佛字典)과 ≪한어문전≫(漢語文典)을 1880~1881년에 간행한 것처럼, 《나한소자전》도 박해로 순교한 다블뤼, 푸르티에(Pourthie, 申),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등이 편찬했던 《나한자전》을 살아남은 선교사들이 부분적으로 다시 만들어 홍콩에서 간행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사전에는 약 1만여 개의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나선사전 [한] 羅鮮辭典 [라] Dictionarium Latino-Coreanum
1936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 乙組)에서 간행한 라틴어의 한글역 사전.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 안응렬(安應烈), 이동구(李東九), 장발(張勃) 등의 도움을 얻어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편찬하였다. 크기는 4 · 6판 780면(面)으로 혁제표지(革製表紙)와 포제표지(布製表紙)의 2종으로 시판되었다. 어휘수는 약 5만개로 법학, 철학, 신학 등 26개 분야의 전문용어를 수록하고 있다. 이미 1891년 《나선소자전》(羅鮮小字典)이 홍콩에서, 1905년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라틴어 교재인 라틴어 문법서가 간행되었으나 사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라틴어사전의 간행은 필연적이었다. 이에 대해 편저자인 윤을수 신부는 《나선사전》의 서문(序文)에서 《나선소자전》의 어휘수 부족과 구식표현을 들어 사전의 편찬이 시대의 요청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959년 경향잡지사(京鄕雜誌社)에서 《나한사전》(羅韓辭典)으로 제목만 바꾸어 영인본(影印本)을 낸 후 한 번의 개정판, 재판도 나온 적 없이 35년 동안 한국의 유일무이한 라틴어 사전으로 교회와 학계에 크게 공헌해 왔다.
나바위 [한] 羅岩 [관련] 화산본당
초기교회 유적지.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유학한 지 9년만에 사제가 되어 이 땅에 첫발을 디딘 황산포에서 2㎞ 떨어진 한적한 마을. 1845년 10월 12일 김신부는 조선교구 3대 페레올(Ferreol, 高) 주교, 5대 다블뤼(Daveluy, 安) 주교를 모시고 황산포에서 이곳 나바위에 도착, 교우 구순오(具順五)의 집에서 은거하였다. 1897년 나바위지방의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는 용안군 안대동 공소에 살면서 성당부지를 물색하던 중 동학란 때 멸망한 김여산의 집을 사들여 성당으로 개조, 사용하였다. 본당 내부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한국 풍속에 따라 남녀 교우들이 구별하여 앉도록 입구도 다르고, 좌석도 칸막이로 가려 구분하였다. 나바위는 김신부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 화산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