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시아(1818~1839). 성녀(聖女). 동정녀(童貞女). 세례명 루시아.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9세 때 모친에게서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했고, 열심히 수계(守戒)하여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하였다. 그 뒤 모친이 사망하자 가산을 전부 팔아 장례를 치르고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며 생활하였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에는 이매임(李梅任)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4월 초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 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정희(李貞喜) · 이영희(李英喜) 자매, 김성임(金成任),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허계임(許季任) 등과 순교를 결심한 후 4월 11일 이들 5명의 여인과 함께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과 혹형을 받았으나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을 이겨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3개월 동안 옥살이한 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노사 [한] 金老沙
김노사(1784~1839). 성녀(聖女). 세례명 로사.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된 후에 입교하여 그 때부터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1839년 1월 16일(음력 1838년 12월 2일) 권득인(權得仁)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형구(刑具)를 내보이며 배교를 강요하는 포장에게 “천주는 신인만물(神人萬物)의 대주(大主)이시라 결코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배교를 거부한 후 혹형과 고문을 이겨 냈다. 그 뒤 형조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모두 이겨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남수 [한] 金南洙
김남수(1922~2002). 주교. 제2대 수원(水原) 교구장. 세례명 안젤로. 만주 간도성 연길현 다조구 대령동(滿洲 間島省 延吉縣 茶條溝 大領洞)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가족을 따라 수원으로 이주,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 덕원(德源)신학교에 입학하여 중등과 · 고등과 · 철학과를 차례로 마치고 1948년 10월 17일 신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1년 동안 혜화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다가 1949년 로마 성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1952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어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1년 동안 사회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하여 왜관 순심고교, 경북대, 효성여대 등에 강사로 출강하였고 1955년 순심고교 교장, 1957년 부산 양정동본당 주임신부, 1960년 대양중 · 공고 교장 겸 부산 서면본당 주임신부, 1966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총장, 1973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지도신부를 거쳐 1974년 10월 5일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1월 2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후 주교회의 부의장을 비롯하여 주교회의의 각 주교 위원회와 전국위원회의 위원과 위원장을 역임하는 한편 1976년 시성시복추진 책임주교, 1977년 군종신부단 총재, 1979년 한국외방선교회 총재 등을 겸임했고, 1980년부터 현재까지는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시성시복 추진운동 · 교회사 자료정리 · 200주년 성서번역 · 통일성가집 발간 · 맹인 개안 무료수술 · 북한 선교사업 등 6개 분야에 걸친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참고 : 김남수 주교는 2002년 6월 1일 선종하였다. 현재 수원교구 교구장은 1997년 6월 4일 제3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최덕기 바오로 주교이다]
김기호 [한] 金起浩
김기호(1824~1903). 전교회장. 명도회장. 세례명 요한. 황해도 수안군 남면 무송동에서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났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에의 뜻을 버리고 글방을 세워 학동을 가르치며 경향(京鄕) 각지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25세 경 중병을 잃고 난 뒤부터 사상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하여 인생(人生) 본질과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끝에 1854년 이마두(李瑪竇)와 홍봉주(洪鳳周)에게 ≪성세추요≫(盛世芻堯)와 성서(聖書)를 빌어 읽고 이 해 8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후 10여년 동안 베르뇌 주교를 보좌하며 전국으로 전교여행을 다녔고, 1866년 병인(丙寅) 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경기도 청계산의 하우현(下牛峴)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강원도 금강산, 양양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1876년 블랑(Blanc, 李福明) 주교,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 등을 맞아들였고 1881년부터 평안도에서 전교하였다. 1883년 일본 나가사끼(長崎)에서 거행된 블랑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귀국길에 중국 상해(上海), 남경(南京), 차쿠(岔溝) 등지의 천주교회를 시찰했고, 귀국해서는 명동성당 건립 준비에 관계하는 한편 1886년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자 차남 상구(相九)를 일본에 보낸 인쇄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1891년 일선 전교활동에서 은퇴하고 하우현에 거주하면서 하우현 성당을 건축하고 본당을 창설한 후 1903년 12월 28일 사망하여 청계산에 안장되었다.
김기호가 남긴 저술로는 1903년 명동성당 준공의 기쁨을 노래한 <성당가>(聖堂歌) 등 천주가사와 ≪구령 요의≫(救靈要義), ≪소원신종≫(溯源愼終), 그리고 40여년간의 전교활동을 회고한 ≪봉교자술≫(奉敎自述) 등이 있다.
[참고문헌] 金起浩 原著, 趙聖熙 譯, 奉敎自述, 교회와 역사(78호~100호), 1982. 1~1983. 10 / 金雲會, 金起浩 硏究, 韓國敎會史論文集, I,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김귀동 [한] 金貴同
김귀동(?~1802).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순교자. 충청도 청양(靑陽) 고산(高山) 출신. 1801년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舟論] 산중으로 들어가 옹기장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 황사영(黃嗣永)이 서울 사는 이상주(李喪主)라고 신분을 속이고 이곳을 찾아왔을 때, 김한빈(金漢彬)과 힘을 합쳐 굴을 파서 그를 숨게 하였다. 황사영은 이 굴에서 중국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를 썼으며, 11월 2일 김귀동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김귀동은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과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홍주감영(洪州監營)으로 이송되어 1840년 2월 2일(음) 끝내 참수(斬首)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出版社, 1980 / 邪學懲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