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iliani, Hieronymus(1486∼1537). 성인. 축일은 2월 8일. 이탈리아의 종교생활개혁자, 수도회 창설자. 베네치아의 상류가정에 태어나 소마스카(Somasca)에서 페스트환자 간호봉사중에 전염, 별세하였다. 1496년부터 군대에 복무, 1508년 성채(城寨) 카스텔 누오보 디 퀘르(Castel Nuovo di Quer) 방어전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탈주하였다. 1528년부터 친구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fa, 1476~1559)의 종교적 지도하에 영웅적인 이웃사랑과 고행(苦行)의 생활에 들어가 병자와 무의탁자의 구호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먼저 베네치아, 브레시아(Brescia), 베르가모(Bergamo), 베로나(Verona), 밀라노 등지에 고아원을 설립, 율수성직자(聿修聖職者)의 수도회를 창립, ‘천주의 가난한 종의 회’(Compagnia del servi dei poveri)란 이름으로 발족, 후에 그 본부 소재지 이름을 따서 소마스카회(Somaschi)로 칭하게 되었다. 174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시복(諡福), 1767년 글레멘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1928년 비오 11세는 그를 고아 및 무의탁 청소년의 보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그의 초상은 손에 쇠사슬을 쥐고, 곁에 탄알이 놓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에비온파 [한] ∼派 [라] Ebionaei [영] Ebionites
1세기에서 4세기에 특히 요르단 동부에서 성행했던 유대계 그리스도교 이단. 에비온파라는 명칭은 에비온(Ebion)을 창설자로 보는 교부(敎父)들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에비온 즉 ‘가난한 이들’과 관계가 깊다(마태 5:3, 루가 4:18, 7:22). 에비온파에 관한 자료들은 산재해 있어 종합하여 통일된 의견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다음의 주장을 했음은 명백하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 예수를 모세가 예언한 구세주(Messiah)로 받아들였으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뽑힘은 예수가 계명을 완벽하게 지킴으로써,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내림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모세법을 강조하여 계속적으로 지킬 것을 주장하였고 성 바울로의 이론과 서간을 부인하였다. 이는 바울로의 하느님 체험을 신들린 환상이라고 믿었고 바울로가 예루살렘의 성 야고보가 의도했던 모세법의 완전한 준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에비온파는 마태오의 복음서를 근거로 하는 ‘히브리복음서’만을 사용하였다. 소위 말하는 ‘에비온복음서’와 글레멘스(Clementine)의 문헌들은 에피파니오(Epiphanius of Salamis)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에비온파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구약(Old Law)의 희생제도는 정결 · 금욕 · 절제 등으로 대치된다고 보았으며, 특히 성세수(聖洗水)에 의해 폐지된 것으로 보았다.
에비온파는 청빈한 공동생활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으며 채식주의와 세례의 신비적 의식에서 절정에 달하는 목욕재계를 행하였다. 유스티노(Justinus), 이레네오(Irenaeus),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히폴리토(Hippolytus), 에피파니오 등이 에비온파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4세기 라틴교부들은 그 때까지 로마와 이집트 · 소아시아에 잔존해 있던 에비온파들을 심마치안(Symmathians)으로 묘사하였다.
에세파 [한] ∼派 [라] Esseni [영] Essenes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와 함께 그리스도시대의 주된 유태교파 중의 하나. 성서나 탈무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필로(Philo Judaeus), 플라비우스 요셉(Flavius Josephus), 플리니(Elder Pliny)에 의해 이 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시작되어 2세기경에 소멸하였으며 팔레스티나지방 밖으로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4,000명 가량이 이 파에 속했으며 엄격하게 조직되어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공동체생활을 하였다. 지원자들은 복종과 비밀엄수에 대한 서약과 더불어 3년간의 수습기를 거쳤다. 그들의 예배나 교리가 엄밀히는 비유태교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바리사이적인 유태교 교리에 의한 가르침에 근사하다. 때때로 주장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이 이 파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 성서에는 이 파에 관한 기록이 없고, 많은 학자들이 에세파를 ‘사해문서’에 나타난 공동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에스델서 [한] ∼派 [라] Liber Esther [영] Book of Esther
에스델서의 그리스어 텍스트(70인역, 대문자로 된 그리스어 역본들, 안티오키아 루치아노의 개정본 등)는 히브리어 성서와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어 텍스트 1장, 3장, 4장, 5장, 8장과 10장에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절들이 상당량 첨가되어 있다.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는 이 구절들을 따로 모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우리말 공동번역을 포함한 현대어 번역본들 역시 종종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다니엘서의 그리스어 첨가부분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제2경전에 속해 있으며, 유태교와 프로테스탄 경전 속엔 삭제되어 있다.
1. 내용 : 유딧서와 마찬가지로 에스델서는 한 유태 여인의 중개를 통한 구원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페르시아에 정주한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대신 하만의 증오로 민족말살이라는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나, 후견인 모르드개의 인도로 왕후가 된 에스델라는 젊은 유대 여인이 개입함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이제 상황은 뒤바뀌어 하만은 처형되고 모르드개는 잃었던 자리를 되찾게 되며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원수들을 몰살시켜 버린다. 이러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푸림제’(Purim祭)가 설정되며 유태인들은 매년 이 축제를 거행하도록 명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설화는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삶 때문에 고대세계로부터 감수해야만 했던 적대감을 우선 표면화시키고 있으며, 이 면에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의 종교박해 이유와 비교해 볼 수 있다(다니엘서 참조). 유태인들의 격앙된 민족주의 정신은 자기 방어세력으로 노출되어 잔인하게 보이는 보복행위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하나의 종교적 명제 즉 푸림제를 드라머틱하게 정당화시켜 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모르드개와 에스델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되며 거기에서 민족구원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러한 설화는 다니엘의 역사를, 특히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억압받다 숭앙된 요셉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요셉 설화 속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외적으로 드러내시지 않으면서도 사건을 꾸준히 주관하시는 것처럼, 히브리어 에스델서에선 하느님 이름조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라도 모든 사건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2. 저작연대 : 그리스어 성서의 마지막 구절은 본 그리스어 에스델서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치세 4년, 기원전 114년에 이집트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따라서 히브리어성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기원전 160년경 팔레스티나에선 이미 유태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라는 기념축제를 거행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대에 벌써 에스델서 또는 에스델서가 전해 주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대략 150년경 히브리어 에스델서가 완성된 것으로 보며 이 시대부터 시작해서 114년 사이에 그리스어 에스델서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3. 종교적 가치 : 비록 히브리어 에스델서가 하느님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더라도 사건의 흐름을 주도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모르드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하느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이며, 에스델이 왕후에 오르게 된 사건 역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 대한 자비로우신 구원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기초단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에스델과 유태인들의 단식행위(4:16)나 모르드개의 공적인 참회행위(4:1), 모두 그 순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 몰라도 결국 이는 하느님의 개입을 간절히 열망하는 신앙인의 기본자세였다. 심판에 공정하신 하느님 외에 그 누가 하만의 음로를 벌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하느님의 이름을 끝까지 침묵하고 있지만 침묵하면 할수록 그분의 존재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중상모략자들의 손에서 다니엘을 구해 내신 분도 바로 이분이 아니었던가? 그리스어 성서의 첨가부분들은 따라서 비종교적인 작품을 종교적인 작품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첨가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서가 지속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바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을 따름이며, 이는 팔레스티나 지방을 떠나 희랍 문화권에 살고 있던 유태교인들로 하여금 본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우리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어떤 자세로 에스델서를 받아들였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정신과 상반되는 보복행위, 그것도 잔인한 보복행위가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보복행위는 유태교의 푸림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과정으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엄청난 차이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 원수들에 의해서 유태인들이 또는 반대로 유태인들에 의해서 원수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화해하여 당신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회개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신자들 눈에 에스델서의 가공할 보복행위는 어떻게 보였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 행위가 아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을 가일층 빛내 주기 위한 전주곡으로 이해됐을 것이 분명하다. “유태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金建泰)
[참고문헌] H. Cazelles, Introduction critique a l’Ancien Tesament, Desclee, Paris 1973 / La bible de Jerusalem(BJ), 5 edition, Cerf, Paris 1978.
에스오에스 어린이마을 [영] S.O.S Children’s Village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그마이너(Hermann Gmeiner)가 2차 세계대전 후 고아들의 참상을 보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1949년부터 설립하기 시작한 어린이 마을. S.O.S.는 “우리들의 영혼을 구하소서”(Save Our Souls)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S.O.S. 어린이마을은 부모가 없거나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어린이들을 부양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어린이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살피자는 데 그 설립목적이 있다. 이 마을에는 여러 층의 나이로 구성된 7∼8명의 어린이들이 한 세대를 이뤄 형제애를 서로 나눈다. 이런 가정 15∼20가구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세계의 모든 S.O.S. 어린이 마을은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본부(S.O.S. Kinderdorf International)는 오스트리아에 있다. 이 마을의 운영은 본부에서 모금한 비용으로 충당된다. 우리나라에는 S.O.S.마을이 1963년 대구시 동구 검사동 98번지에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그 뒤 1981년 서울시 강서구 신월동 산 36의 5번지 서울 S.O.S 어린이마을과 전라남도 순천시 와룡동 158의 6번지 순천 S.O.S. 어린이마을이 설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