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낭(Pierre Guinand) 신부의 한국명. ⇒ 기낭
진보 [한] 進步 [영] advancement
18세기 이래로 인간은 구원의 이상향을 줄곧 진보라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이념으로 분장하려 하고 있다. 진보라는 표현은 계몽시대 중엽인 1750년 종이의 발행자 크리스크로프 밀리우스가 처음으로 독일어로 사용하였다. 신약성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프로코페’(prokop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본래 진보가 아니라, 힘들여 노를 저어서 배를 전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코페’는 한편 신의 자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과 그리스도 추종(追從)의 발전(1디모 4:15, 필립 1:25), 기쁜 소식의 발전(필립 1:12)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암종(癌腫)처럼 발전하여 만연되는(2디모 2:16-17, 3:13) 이단의 발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진보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향해 가느냐에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조건은 사회적 내지 문화적 영역에서 많이 변화되었다. 즉 현대는 진보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를 보다 완전하게 발전시키고 보다 널리 확장할 수 있는 새 길들이 열려 있다. 자연 · 인간 · 사회에 관한 학문의 진보, 기술의 발달, 인간교류 수단의 발달과 조직화가 이런 새 길들을 마련하였다. 소위 정밀과학은 비판적 판단을 매우 발전시켰고 심리학의 새로운 연구는 인간 활동을 보다 깊게 설명하고 있다. 역사학은 사물을 변화와 진보의 각도에서 관찰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고, 생활양식과 관습은 날로 더욱 획일화하고 있으며, 집단생활을 촉진시키는 공업화 · 도시화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원인들이 새로운 문화형태를 조성하며 거기서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행동방법이 생겨났다.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복지에 크게 이바지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유혹도 수반한다는 사실을 성경이 인류가족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 가치질서가 혼란해지고 선과 악이 뒤섞이게 되면 각 개인이나 집단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타인의 이익은 생각지 않는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이미 참된 형제애의 광장이 되지 못하고 인류 자체가 멸망의 위협하에 놓여 있다.
세계 인류역사는 암혹의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투쟁으로 엮어져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투쟁에 말려든 인간은 선에 충실하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과 비상한 노력 없이는 자신의 통일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으며 인간의 진보가 인간의 참된 행복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너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 즉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정해진 인간활동은 죄의 연장으로 변질케 하는 허영과 악의에 가득 찬 정신을 따르지 말라고 하신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이러한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정화(淨化)하고 목적 달성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복음은 가르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고 성신 안에서 새로이 창조되었으므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교인은 피조물을 주신 데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청빈과 자유의 정신으로 피조물들을 사용하는 동시에 그 혜택을 누려야 하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세계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심각하고도 신속한 변화가 점차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이 변혁들이 이제는 인간자체를 변혁시키게 되었다. 개인과 단체의 판단과 욕망, 사물과 인간에 대한 사고방식과 행동에까지 이런 변혁이 반영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크게 확대하면서도 그 능력을 언제나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또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데를 파고들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사회생활이 법규를 점차로 보다 명백히 발견하면서도 사회생활에 방향을 제시하기는 주저한다.
인류가 오늘과 같은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아직도 기아와 빈곤에 신음하고 있으며 문맹자도 적지 않다. 인간이 오늘과 같이 강한 자유의식을 가져 본 일도 일찍이 없었건만 다른 편으로는 사회적 내지 심리적 노예화의 새로운 형태가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종속되어 하나를 이룬다는 의식은 생생하면서도, 서로 힘의 대립으로 극도의 분열을 자아내고 있다. 정치 · 사회 · 경제 · 인종 · 이념 등의 극심한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사상의 교류는 증대되고 있지만 중요한 개념을 표현한다는 말마디 자체는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아주 다른 뜻을 가진다. 현대세계는 보다 완전한 현세 생활의 건설을 열심히 추구하지만 정신적 성장의 노력이 수반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현대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에 현대인의 상당수는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새로운 발명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따라서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사이에서 현대인은 사물의 진행에 대하여 스스로 의문을 품으며 안정을 찾지 못한다. 정신적 동요와 생활조건의 변하는 보다 광범한 변혁에 직결되어 있다. 과학적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방식을 낳아 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우주정복을 시도하게끔 되었다.
인간의 지성은 시간에 대해서까지 그 지배권을 확대시켰다. 역사지식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추정기술과 계획설계로 미래를 지배하게 되었다. 생물학 · 심리학 · 사회학 등의 진보는 인간이 자신을 깊이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사회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인간을 도와준다. 동시에 인류는 인구증가의 예측과 그 조절에 대하여 날로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다. 역사의 흐름도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운명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이미 여러 가지 역사권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혹은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 가고 있다.
이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의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증가되며 동시에 사회화 자체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마땅한 인격의 성숙과 참된 인간관계를 촉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진보는 이미 경제발전과 기술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선진국에 있어서 더욱 명백히 나타나고 있지만 공업화와 도시화의 혜택을 누리려고 희망하는 후진국에 있어서도 이런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특히 오랜 전통을 가진 백성들은 보다 성숙하고 보다 인격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다.
사고방식과 사회구조의 변화는 기존가치에 대한 논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새로운 사태는 드디어 종교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편으로, 날카로워 가는 비판력이 마술적인 세계 개념과 아직 남아 있는 미신적 요소를 종교에서 깨끗이 씻어 버리고 보다 인격적이며 활동적인 신앙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보다 생생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종교생활에서 이탈하는 대중이 격증하고 있다. 옛날과는 달리 신이나 종교를 부정하거나 거기서 이탈한다는 것이 이제는 예외적인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에 와서는 가끔 과학의 진보가 새로운 인간주의의 필연적 요청같이 여겨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여러 지역에 있어서 철학사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문학 · 예술 · 인문과학 · 역사의 해석심리에서 국법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동요되고 있다.
우리는 땅과 인류의 완성시기를 알지 못한다. 우주변혁의 방법도 모른다. 죄로 이지러진 현세의 모습은 분명히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새로운 처소와 새로운 땅을 마련하실 것이고, 거기서는 정의가 지배할 것이며 그 행복은 인간들 마음속에서 치솟는 평화의 온갖 소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으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연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약하고 썩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 썩지 않는 힘을 입을 것이다. 사랑의 업적은 남을 것이며,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피조물 전체가 허영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다.
인간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와 같이 인간의 본성과 노력으로 얻어진 훌륭한 결실을 전부 다 하느님의 성신 안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널리 지상에 전파한 후에, 모든 때를 씻어버리고 광채 찬란하게 변모된 그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를 돌려드릴 때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일 것이다. (⇒) 교회와 문화 (韓庸熙)
[참고문헌] 사목헌장, 서론과 제1부, 3장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 바오로 6세, 어머니와 교사, 1961 / 교회헌장, 41항 / J. 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사, 1979.
진목정 [한] 眞木亭
순교 유적지. 경북 월성군 산내면 내일 2리에 위치한 진목정은 경주에서 월성군 건천읍을 거쳐 청도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던 곳이다. 박해를 피해온 이들 순교자들,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김종륜(金宗倫, 루가) 가족은 언양 대재[竹嶺]에서 만나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정착한 곳이 소래동 단수골이었다. 이들은 나무그릇을 깎아 연명하던 중, 1868년 5월 그릇을 판매하기 위해 경주에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경주아문(慶州衙門)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7월 울산병영(蔚山兵營)으로 이송, 8월 14일(음 7월 28일) 울산의 장대벌에서 처형당하였다. 그 상황을 끝까지 지켜본 야고보의 부인이 그날 밤 형장 근처의 강둑을 파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세 순교자의 유해를 진목정에 안장하였다. 그 뒤 1932년 5월 29일 이들 유해는 대구 신자묘지로 이장되었다가 1947년 10월 신천동 복자성당의 구내로 다시 이장되었다. 진목정은 오지인 데다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교회사적 의의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였다. 경주교회에서 철따라 돌보긴 행지만 종합개발계획이 세워진 것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대구 대교구가 순교유적지 개발계획을 마련하면서부터다.
진리 [한] 眞理 [라] veritas [영] truth [독] Wahrheit
1. 일반적인 뜻의 진리 : 존재자(개별적으로 있는 것)의 자기 자체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의 성질로서, 이 존재자를 남에게 알려주는 것(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자면, aletheuein, 즉 밝혀내는 것). – 말이 그 말이 나타내는 사태와 일치하는 진술의 성질. – 존재와 정신이 일치하는 것(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더 나아가서는 존재와 정신이 서로 완전히 꿰뚫고 있는 것. – 반대말은 ‘거짓’으로서, 말과 그 말이 나타낸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2. 논리적인 진리 : 전통적 고전적인 논리학에서는 두 가지의 개념들(주어와 술어)을 올바르게 연결시킴으로써, 한 가지의 사태를 올바르게 나타내는 판단의 성질을 뜻한다. ‘올바르게 연결시킨다’ 함은 판단 속에서 ‘긍정’으로나 ‘부정’으로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릴 때에는 그 사태가 정신 자체에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고전적인 명제는 “진리는 정신과 사물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자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가 도는 것은 정신(사고, 인식)과 일치한다는 ‘사물’(존재자, 대상)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이런 일치가 순전히 논리적인 법칙(특히 모순율)에 따라서만 이뤄진다면 이런 일치는 단순한 ‘올바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일치가 존재자를 직관적이고, 따라서 내용적으로 현실화시키거나, 이 존재자를 정신적으로 실현시키는 데서 이룩된다면, 이런 일치야말로 진정한 뜻의 진리라 할 수 있다.
3. 인식의 진리 : 우선 인간에게는 진리가 인식의 진리로서 나타난다. 이 인식의 진리(논리적인 진리와 같은 뜻이기도 하다)는 판단 속에서 완성되고, 사고[생각]가 실제로 있는 사태를 정말로 있다고 긍정함으로써, 이 실제로 있는 사태와 동화되는 데서(같아지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인간의 진리는(적어도 이론적인 인식에 있어서는) 존재의 표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진리는 사고가 여러 가지로 규정되어 있는 존재자를 묘사하고, 또 이런 뜻으로 사고가 존재자에 들어맞는 인식이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생각되어지고 묘사된 여러 징표들이 실제로 존재자들에게 있지만 하다면, 들어맞지 않는 인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진리는 그 때 그 때에 파악된 대상에 동화되기만을 요청하고 있다. – 진정한 진리는 ‘보편타당’하다. 이 말은 물론 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방법으로 파악된다는 뜻이 아니고, 한 사람에게 ‘참’인 동일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일 수 없다는 듯이다. 이런 뜻으로 진리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의 진리는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 속에서만 실현되고, 또 인식이 이뤄지는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제약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가 ‘역사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상대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 또 ‘실존적’인 진리는 오직 오성에 의해서만 얻어지는(순수이론적) 과학적인 진리라는 뜻의 ‘보편타당한’ 진리와는 대립된다. 이 과학적인 진리는 필요한 소양을 갖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얻을 수 있다. 과학적인 진리가 ‘의식 일반’에 속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실존적인 진리는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결단을 요청하는 개인의 ‘실존’에 호소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이런 결단이 이성 앞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확신이 증명을 통해 심리적으로 ‘강요될’ 수 없다는 뜻이다.
4. 존재론적인 진리 : 이런 인식의 진리는 존재의 진리(존재론적 진리)와 구별되는데, 이 존재의 진리는 존재(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자)와 존재자 자체에 관련된다. 이 존재론적인 진리는, 스콜라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존재의 적성(適性)이나 가능성을 인간의 정신(판단을 내리는 인식)에 밝혀 주는 것이고, 또 스스로 밝혀지는 존재자의 성질을 뜻한다. 존재자의 근본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이러한 진리는 ‘잠재적인’ 진리로서, 정신의 ‘현실적인’ 진리와 신학적인 사고에 있어서는, 모든 사물들의 잠재적 기초적인 진리의 바탕이, 창조자가 자기의 모범적인 정신의 이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 데에 있다고 보게 되었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자가 정신의 인식에 들어맞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존재자에게는 인간의 인식이 사실과 일치한다는 뜻의 진리는 중요치가 않다. 이런 뜻으로 우리는 ‘참된’ 황금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때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일컬어진 질료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되어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황금처럼 빛나고, 따라서 몇몇 사람들은 황금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황금이 아닌 ‘가짜’ 황금이라는 말도 할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통일성 및 선함과 더불어, ‘초월적’인 규정, 즉 하나 하나의 존재자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라고 헤아려진다면, 우선 이 존재자들이 정신에 들어맞는다는 뜻이고, 이렇게 존재자와 정신이 들어맞음으로써, 하나하나의 존재자들이 사고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 이런 뜻의 존재의 진리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이성을 존재자 자체에 끼여들게 함으로써, 존재자의 초월적인 규정으로 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을 인식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존재자들은 하느님의 정신 안에 있는 이념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제한 받는다. 그래서 존재의 진리는, 모든 존재자들이 그 척도를 하느님의 이념에 두고 있으며, 이런 뜻으로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5. 초월적인 진리 :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잠재적으로나 기본적으로) 참이라는 것, 즉 인식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범적인 이념에 따라 ‘창조’를 했다는 사실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는 언제나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가지의 사실, 즉 존재자는 존재에 참여(관여)하는 자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알 수 있다. 존재는 “맨 먼저 – 그리고 언제나 – 이미 – 있는 것”이다(ens est primum et quasi notissimum conceptum)[성 토마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은 본질적으로 ‘있다(sein)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있다’는 말에 빠짐없이 들어맞으며, 그 어떻게든 알려지며, 또 이런 앎을 바탕으로 해서 더욱 더 잘 알려지게 된다. ‘있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는 포괄적으로, 그러나 초월적으로 모든 것을 ‘참’이게 해준다. 따라서 존재의 초월적인 진리는 한 가지의 현실적인(비록 아직까지는 규정되지 않았고 앞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진리다. 형이상학의 전통에서는 초월적인 진리로서, 참된 것[眞], 선한 것[善], 아름다운 것[美]이라는 세 가지를 내세우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진리와 존재의 진리도 그 바탕은 정신 형이상학의 사고에 두고 있다. 즉 원전한 뜻의 진리는 그저 현실의 절대적인 바탕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바탕은 바로 정신이다. 그래서 진리란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고[아리스토텔레스]와 절대정신[헤겔]이 모든 시간적이고 유한한 주관을 무한히 넘어서서, 무시간적으로 스스로를 밝힌 것이요, 이러한 사고나 정신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스스로를 간직하는 것이다. 유한한 주관에게도 이러한 진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넘어섬으로써 근본적으로는 가능해진다.
‘하느님의 진리’는 ‘종속적인’ 진리로서의 존재의 진리, 인식의 진리 및 진실성 등을 다 내포하고 있다. 피조물들에 대한 하느님의 진리는 주어져 있는 대상에 대해 인식이 들어맞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진리, 즉 하느님의 이념에 피조물이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 하느님의 창조적인 진리와 비길 수 있는 인간의 진리는, 행위를 앞서 가는 양심의 판단과, 예술이나 기술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실천적인 진리다.
6. 윤리적인 진리 : 이 진리는 인간의 행위방식의 성질, 즉 존재자가 존재자 자체와는 어떤 관계에 있고, 다른 존재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 주는 그런 인간의 행위방식들이 성질을 뜻한다. – 이 윤리적인 진리는 말한 것이 그 내적인 확신과 일치하는 것(반대말 : 거짓)만을 뜻하지 않고, 외적인 행위가 내적인 심정과 일치하는 것(반대말 : 속임, 아첨)도 뜻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반대말 :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진리를 인식하려는 정직한 의지 등을 뜻한다. (姜聲渭)
[참고문헌] M, Muller(Hrg.), Kleines Philosophisches Worterbuch, Freiburg 1980 / H. Fries(Hrg.), Handbuch theologischer Grundbegriffe, Munchen 1963 / W. Brugger(Hrg.), Philosophisches Worterbuch, Freiburg 1978.
진도자증 [한] 眞道自證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샤바냑(Chavagnac, 중국명 沙守信, ?∼1717)이 저술하여 1718년 북경에서 4권 2책으로 초간된 교리서로, 주요 교리의 해설과 불교의 비판,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의문점의 규명 등을 주된 내용으로 싣고 있다. 초간 이후 1796년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중국명 湯士選) 주교의 감준 아래 중간되었고 그 후로 상해 토산만(土山灣)에서 1858, 1868, 1917, 1927년에 각각 중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 중엽,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전해져 많은 실학자들과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형제 등 한국 교회 창설자들에게 읽혀졌는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영조(英祖)때 처사 홍정하(洪正河)는 ≪증의요지≫(證義要旨)에서 각각 ≪진도자증≫을 비판하고 있어, ≪진도자증≫이 상당히 일찍부터 도입되어 서학에 관심있는 인사들이 가까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