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균 [한] 楊廷筠

楊廷筠(1577∼1627).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신. 천주교인. 세례명 미카엘. 자는 중견(仲堅), 호는 기원(淇園), 별호로는 정한자(井寒子) · 정포거사(鄭圃居士) · 필원거사(泌園居士) 등이 있다. 항주(杭州)의 인화(仁和)에서 태어났으며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와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支柱)로 추앙받는다. 1579년 거인(擧人), 1592년 진사(進士)가 되어 관직에 진출, 1598년 감찰어사(監察御使), 1602년 호광도어사(湖廣道御使), 1604년 사천도장도사(四川導掌道事) 등을 거쳐 1609년 강소(江蘇)의 남직독학(南直督學)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1601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의 북경(北京) 입성 이후 그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서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09년 관직에서 은퇴한 후 고향인 항주의 인화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고 1611년 이지조, 트리고(Nicolas Trigault, 중국명 金尼閣, 1577~1628), 가타네오(Lazarius Cattaneo, 중국명 敦居靜, 1560~1640)에 의해 항주가 개교(開敎)되자 친구인 이지조의 권유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 후 선교사들의 한역서학서 저술을 돕는 한편 항주의 유력인사들에게 전교하여 이들을 입교시켰다. 1620년 서광계의 청으로 이지조와 함께 마카오에서 서구의 대포를 구입,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1622년 교난(敎難)이 일어나자 하남안찰사 부사(河南按察使副使)가 되어 천주교인의 보호에 힘썼다. 그 후 1626년 항주에 사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힘쓰던 중 이듬해 사망하였다. 저서로 ≪대의편≫(代疑編), ≪천석명변≫(天釋明辨), ≪계앵불병명설≫(鷄鶯不竝鳴說) 등이 있고, 그밖에 ≪칠극≫(七克), ≪서학범≫(西學凡),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서문(序文)을 남겼다.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敎會史人物傳, 香淃公敎眞理學會, 香淃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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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본당 [한] 陽智本堂

주보로 ‘매괴’를 모시는 이 본당은 1927년 9월 14일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유서깊은 교우촌인 은이의 퇴락한 공소강당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龍仁郡 內四面 南谷里) 벌터로 옮기어 16간의 목조 성당을 축성함으로써 창설되었다. 미리내본당의 공소로부터 승격된 이 본당의 박 신부는 1929년 1월 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70명의 교우를 인솔하여 미리내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참배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박 신부는 보수적인 기질이 짙은 이 지방에서 효과적인 전교를 위하여 남녀노소의 특성에 따라 여러 단체를 구성하여 신앙심을 길러주었다. 일요일은 소년단체, 화요일 남자청년, 수요일 소녀단체, 목요일은 여자 노인, 금요일 남자노인, 토요일 여자청년 등 6개 단체를 구성하여 신심운동을 일으켰다. 1934년 8월에는 또 지방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해성의숙(海星義塾)을 개설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큰 첨례(대축일) 때에는 재미있는 교리토론으로 은연중 교리공부가 되도록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이 본당의 신자는 나날이 증가추세를 보여 1939년에는 성당을 40평 가량 증축해야만 되었다. 이 때 박 신부는 교우들의 앞장을 서서 손수 터를 닦고 돌을 날라 담장을 쌓은 것이 후일 돌무더기 성당으로 이름난 연유이다.

1941년 7월 2일 본당신부로 프랑스인 프로망투(Fromentoux, 包萬壽)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전쟁중이라 일제의 제약을 받아 사목활동이 어려웠다. 8.15광복 후 1947년 9월 6일 교우들은 이 고장과 인연이 깊은 김대건 신부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벌터에 김대건 신부의 기념경당(紀念經堂)을 건립하였다. 1948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자 배매실[南谷一里)에 있는 일본인 다까하시(高橋) 소유이던 주택과 대지 등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창고를 개조하여 벌터로부터 성당을 옮겨왔다.

1951년 4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는 원만한 성격에 사랑을 기조로 사목하였기 때문에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1953년 말에는 신자수가 3,039명에 달하였다. 조 신부는 숙제인 성당신축을 위하여 교우들의 성금을 모으고,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955년 4월 19일 78평의 현대식 성당을 축성 봉헌하였다. 1959년 용인본당을 분할하고 명칭을 양지본당으로 바꾸었다. 그 뒤 5대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를 거쳐 6대 정주성(鄭周成, 요셉) 신부가 재임하던 1962년 9월 20일에는 김대건 신부의 모친인 고(高) 우술라가 살고, 김대건 신부가 순교 전 최후의 미사를 드린 골짜기에 김신부상(金神父像)을 건립하여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이 유적지는 성역(聖域)으로 오늘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7대 주임은 손태섭(孫泰燮, 마르코) 신부, 8대는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맡았고, 1980년부터 9대 주임으로 한봉주(韓鳳株, 클레토) 신부가 본당을 맡고 있다. 한 신부는 사목활동에 힘쓰는 한편 골배마실 김대건 성인 사적지의 성역화 작업에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현재 이 본당의 신자수 1,547명에 13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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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양능 [한] 良知良能 [영] synderesis(syneidesis) [그] synderesis(syneidesis)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쓰여 온 용어로서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사물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synderesis’ 즉 ‘양심의 번뜩임’(spark of conscience)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양심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인데, 이 경우의 양심이란 기본 원리를 알고 있고, 특정의 인간적인 행동의 선악(善惡)을 판단하고 이를 구체적인 행동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양지양능’이란 용어를 좀 더 확실하게 정의하자면 도덕률(道德律, moral law)의 기본적인 여러 원리, 즉 실천면에서의 보편적인 제일차적인 원리를 아는 습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행위의 기준, 즉 도덕적인 행위의 규범이 되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도덕률 또는 도덕법칙이라고 하며, 이는 다시 말을 바꾸자면, 도덕에 있어서의 당위(當爲)의 원리인 것이며, 현실적인 행위 일반의 원리와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실천면에서의 보편적인 가장 중요한 원리를 아는 습성이라는 것은 본능이나 욕구에 대립되는 이성이나 신을 근본에 앉혀 놓은 입장에서 도덕의 원리를 아는 습성이라고 해석된다.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에 의하면, ‘양지’[량지]는 ① 이성, 지능, 분별력을 말하거나, ② 선의(善意), 선의의 사고(思考), 좋은 의도를 뜻하며, ‘양능’은 ① 이성, 지능, 분별력 ②용기, 박력, 능란한 솜씨, 재능을 뜻한다. ‘양지’와 ‘양능’이 합하여 된 ‘양지양능’이라는 말은 타고난 지능 또는 지혜를 가지고서 사물을 알고 행함을 지칭한다고 보겠다.

일찍이 정하상(丁夏祥)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말하는 사물의 ‘네 원인’[質 · 貌 · 作 · 爲]을 들어 “만유(萬有)를 통하여 주재(主宰)가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지적, ‘천지의 작자’(作者)가 있음을 증명하였는데, 이 ‘아는 것’을 ‘양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입장은 만물과 ‘양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경서(經書)를 통한 즉 양명학(陽明學)에서의 ‘양지’가 마음의 본체(本體)이고, 지의 수행[致良知]과 행위를 바루는 격물(格物)과는 동일행위의 양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주장도 인용하여 ‘천지의 주재’를 증명하였다. 또한 정약종(丁若鐘)의 경우, ‘양능’을 “인심이 천주계심을 아느니라”로 풀이하였다.

[참고문헌] 崔奭佑, 天主實義에 대한 韓國儒學者의 見解, 東亞硏究, 제3집, 西江大學校 東亞硏究所, 198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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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본당 [한] 良川本堂 [관련] 노안본당

1904년 설립된 양천본당은 1927년부터 현재의 노안(老安)본당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 노안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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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본당 [한] 楊平本堂

주보로 ‘예수성심’을 모시는 이 본당은 1943년 오연희(吳然喜, 마티아)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양평군 양근3리(楊根三里). 양평 땅에서 본당이 먼저 설정된 곳은 양평읍이 아니라 용문(龍門)이었다. 1908년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가 용문면 덕촌리(龍門面 德村里, 退村)에 주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평과 용문은 겉으로는 한쪽이 본당이요, 다른 쪽은 공소이긴 했으나 한 본당이나 다름없었는데도 양쪽 교우들은 서로 본당신부를 자기 지역에 주재시키고자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1943년에 이르러 본당이던 용문은 양평공소가 되고, 용문본당의 공소이던 양평은 본당이 되었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의 양평 초대 본당신부는 오연희 신부였는데, 처음에 용문에 부임하였던 오신부가 전임 신부들의 뜻을 따라 양평읍에 주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신부 재임시에 성당을 지어 축성식을 하고, 1947년 이완성(李完成, 요한) 신부, 1948년에는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여 2년간 사목하였다. 1949년 9월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서 6.25동란이 나고, 본당은 일시 부산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으로 말미암아 양평 성당은 파괴되고, 주임인 이계중 신부는 군종 신부로 입대하니, 얼마동안 공백기를 겪기도 하였다.

1952년 12월 김정진(金正鎭,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활기를 되찾은 이 본당은 용문까지 관할하면서 1954년 4월에는 양평 유치원도 설립하였다. 또 이 해 11월 18일에는 1,000평의 대지에 85평의 성당도 낙성하였다. 또 1956년 12월에는 용문성당도 짓게 되고, 그 해의 신자총수는 용문공소를 합하여 1,600명에 달하였다.

1957년 3월 김정진 신부는 가톨릭대학 조교수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평양교구 출신인 강현홍(姜賢洪,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그의 재임 중인 1958년에 용문공소가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어 독립하였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그 관할로 편입되었다. 현재 본당주임은 최충렬(崔忠烈, 마태오) 신부이며, 성가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나와 있고, 신자총수 1,547명에 6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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