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es(기원전 384~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에서 마케도니아왕의 시의(侍醫)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배운 다음, 수사학(修辭學)의 교사가 되는 등 거기서 20년간을 살았다. 그 후 마케도니아왕의 초빙으로 13세의 왕자 알렉산데르의 교육을 맡아 7년간 종사하였다. 기원전 335년경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 학원을 세우고, 여기에서 평생을 강의 · 연구 · 저술에 몰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 노트이다.
그의 연구는 광범하여 철학을 이론 · 실천 · 시학(詩學)의 3부로 나누어, 실천철학에서는 개인과 사회인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덕은 중용(中庸)에 있다고 하였다. 시학에서는 예술의 본질을 다루었다. 이론철학은 그런 바탕으로 구성하고, 실재(實在)의 변화를 다루는 자연학과 비질료적(非質料的)이지만 실재도 아닌 수를 다루는 수학과, 실재와 불변성을 특징으로 하는 제1원인을 다루는 신학으로 구분된다. 이상의 세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이 논리(오르가논)이다. 그는 밀레투스학파 이래 철학자들이 추구한 원리에 대한 역사를 검토하고 자연철학자들이 사물의 주요원인으로 본 질료(質料)[근본물질] 외에 더 중요한 원인이 있어, 그 질료를 일정한 사물로 이루게 하는 원리로서의 형상(形相, 에토스)이 있다는 것을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설에서 배웠다.
그러나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에토스)를 질료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추상적 초월적인 실체로 본 것과는 반대로 그는 형상을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로 보고, 모든 존재를 질료와 형상과의 분리되지 않은 결합으로 봄으로써 그는 인간에 가까운, 감각할 수 있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이 설명방법을 천체(天體)로부터 기상계(氣象界) · 생물계 · 인간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에 적용시켜 고대의 최대 학문체계를 세웠다. 그는 모든 발전을 질료와 형상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일체의 변화는 새로운 것을 생성케 하는 원인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우리가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는 아무것도 정신적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인 설명에 있어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변화의 종국적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라면 안 되고, 변화의 종국적인 원인 그 자체는 불변적인 것이어야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에 있어, 이 종국적인 것은 실재적으로 보면 그 자체가 최초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변화의 제1원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불변적인 것이므로 자체 속에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철저한 현실성(순수 현실)이며 모든 본질적인 것의 출발점으로서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형상이고, 형상과 질료의 합성이 아닌 유일의 것이다.
제1질료는 신과 함께 영원한 옛날부터 순수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다른 사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가치는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신은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가장 완전한 존재이다. 신의 활동은 최고의 것이며 완전한 활동이고,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독립한 사유, 순수한 ‘관조’(觀照)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위대한 철학자가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의 이교적 사고방식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그를 훌륭한 철학교사로서 친교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학문적 서술, 특히 술어적(術語的) 정돈을 위한 방법과 체계화가 그의 업적에 힘입어 이루어졌던 것이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사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특히 환영한 점은, 첫째 실재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이며 다음은 유신론적 세계관의 바탕을 그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세계창조의 개념과 세계의 시간적 시발의 상정(想定)이 없고, 그가 말하는 신은 세계에 대하여 오직 최고의 운동원인으로 작용하는 데 불과하지만,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 유신론의 정신으로 쉽게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영혼론도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고도의 이성의 불멸성을 인정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그가 세계를 하나의 질서(ordo)로 해석한 점은 특히 그리스도교적 사상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질서의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도덕원리와 사회조직의 유도(誘導)방식도 그런 세계관과 조화되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것이 스콜라학에 의해 계승되고 완성되었다.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아우구스티노주의자 간에 열띤 논쟁도 있었으나 아우구스티노의 발랄하고 활기찬 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카데믹한 방식이 잘 결합됨으로써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풍요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참고문헌] The Encyclopedia of Phylosophy, Macmillan and Free Press, 1980 / New Catholic Encyclopedia, Washington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