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스딩 [관련]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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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라] Augustinus

① 아우렐리오~(Aurelius A., 354~430). 성인. 히포(Hippo)의 주교. 교회학자. 축일 8월 28일.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 출신. 모친 성녀 모니카(St. Monica)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므로 그는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 카르타고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을 공부했는데 이 당시 그리스도교를 떠나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15년간 지속된 방탕생활에서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보게 되었다. 치체로(Cicero)의 ≪Hortensius≫를 읽고 감명받았으며(373년), 마니교를 통해 진리를 얻으려고 9년간이나 시도, 383년에는 수사학 교사로 로마에 갔다. 이듬해 밀라노로 이주, 성 암브로시오와의 해후로, 그의 영향,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바울로에 대한 독서를 통해 개종을 결심, 카시치아쿰(Cassiciacum)에서의 침잠 후 387년 부활 전야에 세례받았다. 388년 타가스테에 일종의 수도원을 세우고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391년 고향의 연로한 주교 발레리우스(Valerius)에게서 서품, 수도원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곧 아프리카 교회문제의 중요인물이 되어 395년 발레리우스의 보좌주교를, 396년부터 사망 때까지는 그 곳 주교를 지냈다.

그의 탁월성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에 있다. 사제기간 중 크게 3가지의 이단 즉, Donatus 이단, Pelagius 이단, Manichaeism 문제와 대결, 이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교회와 성사, 성사적 은총 등의 문제와 관련된 교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이를 통해 서양신학이 형성되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구성원들의 상호 자선행위를 통해 하나를 이루며 그 구성원 때문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 신성하다. 교회 안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모두 있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악한 자는 남아 있을 것이다. 교회 밖에도 선한 이들이 있지만 죽기 전에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성사의 집행에 있어서의 ‘합법성’과 ‘규칙’ 사이의 구분을 발전시켰다. 속권을 신국(神國)의 일부로 받아들이나 그것은 진정한 신에 대한 숭배와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한에 있어서이며, 이단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의 조력을 인정하나 사형제(死刑制)는 간곡히 금하였다. 후기에는 펠라지오주의 논쟁에 종사, 타락과 원죄, 그리고 예정설(豫定說)에 대한 교의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예정설은 말기의 저서에서 형식을 갖추어 뒷날에 루터 ·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단과의 논쟁을 통한 저서 외에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es, 400?)과 ≪신국론≫(神國論) 등의 대작이 남아있는데, 전자는 개종까지의 자서전이며, 후자는 로마가 알라릭에 의해 함락(410년)된 이후에 씌어진 최초의 역사철학서이다. 방대한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와 자신의 문학작품을 정리한 ≪Retractation≫ 등도 전하고 있다. 후대 철학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실로 지대하여서 중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철학의 전 내용과 서양 신학의 현재의 모습을 결정짓게 하였다.

② 캔터베리의~(A. Cantuariensis, ?~604). 성인. 주교. 축일은 5월 27일. ‘영국의 사도’로 불린다. 로마 태생. 로마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으로 있던 596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고 앵글로 색슨 민족의 그리스도교화를 위해 30명의 수사와 함께 영국 켄트에 파견되어, 597년 캔터베리 주교, 603년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결혼 전부터 그리스도 교도였던 켄트왕 에델버트의 비(妃) 베르타의 도움으로 국왕으로부터 특별한 편의를 제공 받아, 전도 수개월만에 그리스도교는 공인(公認)되었다. 국왕을 위시한 많은 국민이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결국 켄트는 그리스도교국가가 되었다. 그는 유스토(Justus)를 로체스터주교로 앉혀서 메드웨이 강 서쪽의 전도를, 멜리토(Mellitus)를 런던 주교로 앉혀서 이스트 색슨족의 전도를 각각 맡아보게 하였다. 유해는 캔터베리에 있는 성 베드로 및 성 바울로 대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이 수도원은 후에 성 아우구스티노 대수도원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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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수녀회 [한] ∼修女會

가장 알려진 것으로 성모승천회(Augustiniani Assumptionis), 넓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참사수녀회(Canonesses Regular of St. Augustine)이다. 비르지타회(Virgittinae) 등처럼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칙을 따르는 모든 수녀회를 포함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아우구스티노회 제1회에 의해 창설되었거나 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수녀회를 말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제2회는 1264년 네카르(Neckar)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 봉쇄 수녀들이 남자 아우구스티노회 독일 관구 관할에 놓이면서 탄생되었다. 이들은 대개 독립적인 대수도원을 이루고 엄격한 봉쇄생활을 하였다. 1599년 스페인에서 환(Juan de Ribera) 대주교는 맨발의 아우구스티노회를 창설하였는데 그 뒤 스페인의 개혁가들(아우구스티노 레콜레티회)은 수녀들의 교육활동을 개발하고 이것을 외국에 성공적으로 소개하였다. 1965년에 제2회는 이탈리아에 28개와 스페인에 46개 등을 포함, 모두 93개회가 있었다. 현재 전세계에 4,701명의 종신서원자가 있다(1983년 교황청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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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주의 [독] Augustinianismus [한] ∼主義 [라] Augustinianismus [영] Augustinianism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사상은 교부학(敎父學)의 주요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교부들의 사상적 유산의 새로운 재구성(再構成)의 길을 거쳐서 유럽 중세의 사상권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동인(起動因) 역을 하고, 사상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의 전모(全貌)를 살피는 것을 피하고, 이른바 ‘아우구스티노주의’라는 보다 좁은 뜻의 개념만을 고찰하기로 한다. 우선 신학적 분야에서는 중세는 결정적으로 아우구스티노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특히 그 대부분이 그의 텍스트를 인용함으로써 성립되는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명제집≫(Sententiarum libri)에 의해 스콜라 학자들에게 신학적 사색의 기준을 제시해 주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가 펠라지우스 논쟁에 의해 형성한 <은총론>은 교리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이지만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것을 충분히 계승 · 전개하지는 못했으므로, 좁은 의미의 아우구스티노주의에 의해서 종종 일면적(一面的)인 해석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노파 수도회에 의해 대표된다. 그 전형적인 것은 9세기의 고트샬크(Gottschalk)의 이중예정설(二重豫定說)에서 볼 수 있는 은총론, 14세기에는 브래드와딘(Thomas Bradwardine)의 신학적 결정론에서 짙은 영향을 받은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사상이며, 더 나아가 17세기의 얀센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 철학적 방면에서는 13세기 아우구스티노주의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

13세기를 포함해서 그 이후의 철학에도 아우구스티노주의의 흔적은 짙다. 특히 인식론에서는 그의 조명설(照明說)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전개가 있었다. 즉, 자연적 인식도 직접적인 신적 조명에 의해 성립되며, 그 때 신은 아비첸나(Avicenna)의 이른바 능동이성(能動理性)의 기능을 써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적 조명설을, 개념은 추상에 의해 경험에서 얻어진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추상설에 결합하는 경향도 있었다(Alexander Halesius 및 Bonavetura 등). 또한 아우구스티노주의적인 형이상학으로서 아비체브론(Avicebron, 1020?~1058?)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주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주의에서 의지는 지성보다 우위를 유지한다고 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가 제창되고, 따라서 신의 지성적 인식에서보다는 신의 사랑에 있어서 영원한 지복(至福)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주의의 주요한 대표자로는 기욤 도베르뉘(Guillaume d’Auvergne, 1180?~1249), 크레모나의 롤랑(Roland, 13세기), 생 빅토르의 후고(Hugo, 1096~1141), 라로셀의 요한(Joannes),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 아콰스파르타의 마테오(Mathaeus, 1235?~1302), 페캄(John Pecham, 1210?~1292), 라마르의 기욤(Guillaume), 마르스톤의 로제(Roger) 등을 들 수 있다. 13세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우위성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아우구스티노주의는 지속적으로 스콜라학의 근저에 존재하면서 중세 말기에서 근대에 걸쳐 플라톤 부흥과 함께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참고문헌] J. Riviere, Le dogme de la redemption chez saint A., Paris 1928 / E. Krebs, Sankt Augustin, Koln 1930 / H.I. Marrou, S. Augustin et l’augustinisme,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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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회 [한] ∼會 [라] Ordo Sancti Augustini [영] Augustinian Order

아우구스티노회란 아우구스티노 공동생활규칙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수도회, 즉 7개의 기사수도회, 도미니코회, 프레몽트레회, 성모 마리아의 종회(Ordo Servorum Mariae), 노예구제 수도회, 성삼위일체회, 알레시오회, 간호수도회 등을 총괄한 명칭이다. 아우구스티노수녀회는 이 규칙에 입각한 여자수도회의 총칭이며 아우구스티노회를 크게 나누면 아우구스티노 참사수도회(參事修道會),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隱修士會), 성모 승천의 아우구스티노회로 구분된다.

1. 아우구스티노 참사수도회 ~參事修道會 [라] Canonici Regulares S. Augustini. 영어로는 ‘Augustinian Canons’ 또는 ‘Augustin Regular Canons’라고 칭한다. 아우구스티노 공동생활규칙을 채용하고, 3가지의 서원을 하며 그레고리오 개혁에 입각한 정규수도회로 조성된 공동생활참사회 또는 주교좌성당 참사회를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노 및 동료 성직자들이 히포(Hippo)에서 실행한 공동생활의 이상은 초대교회 사도들을 모범으로 삼고 그들 이전의 동방 수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메츠의 주교 크로데강(Chrodegang) 및 아헨회의(816~819년)에 의거한 프랑크개혁은 후에 니콜라오 2세 교황 및 특히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쇄신되면서 많은 참사회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하였다. 이와 비슷한 참사회가 일찍부터 북아프리카, 갈리아, 이탈리아, 영국 등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1059년의 라테란 회의에서 통일 정비되어 서유럽 각지에까지 미치는 강력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이 수도회를 개혁한 인물로는 교황 베네딕토 12세(1339년), 추기경 카스틸리오네의 브란다(Branda de Castiglione, 1420년), 니콜라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51년) 등이 있다. 한 때는 유럽에만 4,500여개의 참사회 성당이 있었고, 교황 36명, 추기경 약 300명 및 많은 주교를 배출하는 등 크게 번영했으나, 이른바 종교개혁, 18세기의 수도원 해산 및 교회재산 몰수 등으로 쇠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계통의 라테란회(Canons Regular of the Lateran) 등이 잔존하여 활동하고 있다.

2.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隱修士會 [라] Ordo Eremitarum S. Augustini, O.E.S.A.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대칙서 (1256)에 의해 형성된 은수사회로, 주교권(主敎權)이 면속(免屬)되어 있다. 1567년 교황 비오 5세는 이것을 탁발(托鉢) 수도회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루터(Martin Luther)가 소속되었던 수도회가 이것이다. 처음에는 은둔적 성격이 짙었으나 얼마 후부터 도시에 수도원을 두고, 학문연구 · 전도 · 교육 등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해외포교를 위해 일찍이 14세기에 레겐스부르크의 보좌주교 니콜라오 테셸(?~1371)이 많은 협력자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의 회원 베드로 아 그라시아가 콩고 · 앙골라 · 미나에까지 이르렀었다. 신대륙 발견 이래로 특히 스페인 · 포루투갈의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는 활발한 포교활동을 시작, 1533년부터 멕시코, 1550년부터 페루, 1603년부터 콜롬비아, 1618년부터 에쿠아도르, 그리고 1564년부터 필리핀, 1575년부터 중국, 1603년부터 일본에 포교하였다. 포르투갈의 동회는 1572년 동아프리카 및 아라비아 연안에서 포교를 시작, 그 후 벵골 · 인도지나 ·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교육면에서는, 수도회부속학교 외에도, 스페인의 살라망카, 포르투갈의 코임브라, 알칼라, 에스코리알, 이탈리아의 로마, 파도아, 피사, 나폴리, 영국의 옥스퍼드, 프랑스의 파리, 오스트라아의 빈,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에르푸르트,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마인츠, 쾰른, 비텐베르크 등의 대학에 많은 교직자들이 봉직,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다수의 초 · 중등학교를 경영하고 있으며, 각 방면에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동회는 현재까지 수십 명의 성인 목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14세기 이래로 여러 개혁이 잇따라 같은 계열의 여러 수족(修族)이 생겼으며, 특히 스페인 · 이탈리아 · 프랑스 등에는 맨발수도회가 탄생하였다. 현재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에는 3개 수족, 약 5,000명의 회원이 있으며, 전례생활 및 교육,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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