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千禧(?∼1801). 순교자, 세례명 요한. 평안도 선천(宣川) 출신. 그의 입교시기는 알 수 없으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지켰고 교회일에는 늘 앞장서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심부름으로 여러 번 중국에 내왕하면서 맡은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이 박해를 받고 있는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기 위하여 쓴 백서(帛書)를 중국을 내왕한 경험이 많고 또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옥천희가 황심(黃沁)과 함께 가지고 가기로 약속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8월경에 잡히고, 이어 황심과 황사영이 잡힘으로써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그는 이 일로해서 1801년 12월 10일(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옥천본당 [한] 沃川本堂
청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예수 아기의 성 데레사’. 소재지는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忠北 沃川郡 沃川邑 三陽里). 옥천지방은 1903년 공주본당 주임 파스키에(P. Pasquier, 朱若瑟) 신부의 전교로 공소로서 개설된 후 교세가 신장됨에 따라 1906년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909년 20여평의 성당을 짓고, 본당 소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소작케 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전교하였다. 1913년 홍병철 신부가 급서하자 이종순(李鍾順, 요셉)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 1915년까지 사목한 후 전임되었고, 그 후 대전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28년 9월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출발하였다. 그러나 1942년 윤예원 신부가 전임되자 다시 대전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고 1948년 9월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부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30여평의 성당이 신축되고, 1953년부터는 메리놀회 신부들이 주임으로 부임하기 시작, 이때부터 본당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어 1955년 옥천읍내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0여평의 성당이 신축되고, 성모의원(나환자 진료소)과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1955년 보은성당, 1956년 영동본당, 1957년 황간본당 등을 분할 · 독립시키고, 1958년 청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 주임은 서정혁(徐廷赫, 프란치스코) 신부이고, 예수성심 시녀회 수녀들이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사목과 전교를 돕고 있다. 1984년 현재의 교세는 신자수 1,272명, 공소 4개소이다.
옥중서한 [한] 獄中書翰
순교자들이 옥(獄)에서 쓴 수기, 일기, 편지 등을 말한다. 신약성서 중 사도 바울로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등은 가장 대표적인 옥중서한이다. 한국교회에서는 1784년 교회창설 이후 100여년간 계속된 박해로 인해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면서 자신들의 열절한 신앙과 옥중생활을 아름다운 필치로 남겨 왔는데 1791년 진산(珍山) 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교한 윤지충(尹持忠)의 수기 <죄인 윤지충일기>를 비롯하여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의 편지, 1827년 전주에서 옥사한 이경언(李景彦)의 수기, 1846년 순교한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회유문 <교우들 보아라> 등이 대표적 옥중서한들이며 이중 이순이의 편지는 신앙의 순결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순이의 편지와 이경언의 수기는 <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엮어져 필사되어 현재에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외에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편지, 1827년 순교한 신태보(申太甫)의 편지, 1839년 순교한 이문우(李文祐)의 편지 등이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에 상세히 소개되어있다. 또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체포된 후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에게 자헌(自獻)을 권하는 편지를 썼고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Ridel, 李福明) 주교도 자신의 체포에서 추방까지를 기록한 옥중수기를 남겼다.
이러한 옥중서한들은 자신의 체포 · 신문과정 · 옥중생활에 대한 기록, 친척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언형식의 권면과 위로 등이 주된 내용이며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사목서한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박해 속에서도 교우들에게 전해져 널리 읽혀짐으로써 교우들의 신앙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中·下, 분도출판사, 1979∼1980 / 韓國敎會史硏究所 編, 순교자와 증거자들,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옥스퍼드운동 [한] ~運動 [영] Oxford movement
1833년에서 1845년까지 옥스퍼드 성직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영국 교회의 신앙 부흥 및 교회 개혁 운동. 영국 교회는 종교 개혁 때부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의와 예배가 혼합되어 있었다. 2개의 분리된 요소들이 국가적인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융합되어 있었는데, 1688년 혁명으로 프로테스탄트당(黨)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신앙의 궁극적인 권위를 국가에 귀속시키면서 국교회의 자주성을 위협하였을 뿐 아니라 침례교도들의 운동이 발흥함에 따라 많은 신자들이 국교회에서 이탈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가톨릭의 전통, 특히 고교회파의 신학적인 전통으로 국교회의 자주성을 확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최초의 움직임은 1833년 아일랜드에서 10명의 영국주교가 억압당하고 있을 때에 일어났다. 케블(J. Keble)이 교회의 세속화에 대하여 <국민의 배교>(National Apostasy, 1833. 7. 14)라는 설교를 통해 비판하고 나섰으며 이어 옥스퍼드 운동의 거장 뉴먼(J.H. Newman)이 운동의 이념과 신학적 기초를 41권의 소책자에 실어 배포하면서 운동은 급진전하였고 1839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운동의 발전과 함께 자유 진영의 반격도 거세졌다. 그러나 운동의 소멸은 뉴먼이 로마 가톨릭에 개종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뉴먼의 개종 후 급진적인 운동가들 다수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 운동은 영국 교회를 자각시켰고 성직의 권위를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