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미나 [라] Ad limina(Apostolorum)

교회법에 따라 주교는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묘지를 참배하고 교황에 순종하는 뜻을 표하며 그가 관장하는 교구의 상태를 보고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주교가 5년마다 정기적으로 로마를 방문하는 것을 ‘아드리미나’라고 한다. 기원은 교황 아래 있는 이탈리아 주교들과 교황으로부터 서품을 받은 주교들이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했던 로마지방교회의 회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습이 11세기 이후에는 의무로 주어졌고, 13세기초에는 면속대수도원장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으며, 15세기 이후에는 교황에 의해 공인된 모든 주교들이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다. 1585년 교황 식스토(Sixtus) 5세는 대칙서(Romanus Pontifex)를 공포하고 모든 대주교와 주교에게 교구상태에 대해 교황에게 정기보고서를 제출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1740년 교황 베네딕토(Benedictus) 14세는 명목주교에게는 의무를 면제하고 면속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의무를 부과하였다.

1909년 성 비오(St. Pius) 10세는 이를 그대로 교회법에 채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재치권을 가진 모든 주교는 직접, 혹은 대리를 통해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즉 1911년을 원년으로 삼고 제1차년에는 이탈리아 · 코르시카 · 시칠리아 · 사르디니아 · 말타 등의 주교가, 제2차년에는 스페인 · 포르투갈 · 프랑스 · 벨기에 · 네델란드 · 영국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 등의 주교가, 제3차년에는 그 외 유럽 주교, 제4차년에는 아메리카의 주교, 제5차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의 주교가 교황청을 방문해야 한다. 1975년 바오로 6세는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10년마다 로마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을 고쳐 모든 교구가 5년마다 정기적으로 로마를 방문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만약 방문연도에 신임주교가 임명된 지 2년이 경과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정기 로마방문의 의무가 1회만 면제된다. 한국은 1975년의 결정에 따라 1980년 첫 방문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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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전례 [한] ~典禮 [영] Armenian rite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례. 실질적으로는 성 바실리오(St. Basilius, 329~379)의 그리스정교 전례를 뜻한다. 로마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으나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면서 그리스정교 고유의 의식(儀式)과 관습을 지키는 동방 가톨릭 교도(uniat)와 그레고리오 교회에서도 사용된다. 아르메니아 전례는 안티오키아 전례의 몇몇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원래 시리아어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고대 아르메니아어로 되어 있다.

미사 전례는 매우 단순하며 대부분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데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① 성물 안치소(sacristy)에서의 준비기도, ② 성가대의 준비기도, ③ 제단의 봉헌 준비, ④ 예비 미사, ⑤ 신자들의 미사로 이루어진다. 성찬식에서는 라틴 전례의 성체(聖體)보다 더 큰 형태의 누룩 안 든 제병을 사용하며 포도주에 물을 섞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영성체만을 하고 합동 동방 가톨릭 교도와 그레고리오 교회에서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양형 영성체를 한다. 이 전례는 율리오력에 따르며, 주의 공현 대축일을 1월 5일에서 13일 사이에 기념한다. 성호를 긋는 방식은 라틴 전례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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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델트 [원] Arcadelt, Jakob

Arcadelt, Jakob(1514~1557). 네덜란드의 마드리갈곡, 미사곡, 경문가곡(經文歌曲)의 작곡자. 1539년부터 1555년까지 로마에 체재하였고, 그 후 파리에서 살았다. 그는 실제로 베네치아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나타나게 되는 베네치아 학파의 거두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에게 준 많은 간접적 영향 때문에 이 학파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처음에 피렌체에 잠시 있다가 로마에 가 성 베드로 성당의 창자(唱者)로, 이어 교황청 합창단의 일원으로 있었다. 그의 음악의 특징은 정서적 감동이 풍부하고 견고한 밑바탕 위에 건설된 투명한 화음(和音)이며, 작품은 마드리갈곡이 5권, 미사곡이 1권, 그리고 무수한 경문가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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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원] Argentina

면적 276만 6,889㎢에 인구 2,916만명(1982년 추계)의 남아메리카의 독립 공화국, 북쪽으로 볼리비아, 북동으로 파라과이, 동으로 브라질, 우루과이와 대서양, 서로 칠레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 탐험 때(1519~1520) 가톨릭 사제 몇 사람이 함께 와서, 십자가를 계시하고 미사를 올렸고, 원주민도 호기심에 수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1536년 2월 멘도사(Pedro de Mondoza)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여 세 곳에 교회를 세웠다.

1547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를 포함하는 리오(Rio de la Plcta) 교구를 창설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선교 활동은 주로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의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의 예수회의 활동은 1767년 예수회가 쫓겨남으로써 끝나고 대신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메르세다리언회가 선교 활동을 하였다.

1853년부터 1880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가톨릭 교세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지식인들이 이반하였기 때문인데, 지식인들은 기성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프리메이슨 운동에 많이 경도(傾倒)되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에스트라다(jose Manuel Estrada)가 대단히 전투적인 가톨릭인 Union Catolica를 조직하고, 일간지 을 발간하여 가톨릭 정신을 고취하였다.

1902년 아르헨티나 의회에서 이혼법을 논의하였을 때 투쿠만(Tucuman) 출신의 젊은 입법의원 파딜라(Ernesto E. Padilla)가 이를 부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2년의 이혼법 통과 저지에 승리하자 초기의 박해와 점점 세력을 얻고 있었던 좌익화 운동에 흔들리고 있던 가톨릭의 일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현재 아르헨티나는 2,707만명의 가톨릭 신자에 63개의 교구, 2,210개의 본당을 거느리는 대 가톨릭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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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원] Aristoteles

Aristoteles(기원전 384~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에서 마케도니아왕의 시의(侍醫)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배운 다음, 수사학(修辭學)의 교사가 되는 등 거기서 20년간을 살았다. 그 후 마케도니아왕의 초빙으로 13세의 왕자 알렉산데르의 교육을 맡아 7년간 종사하였다. 기원전 335년경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 학원을 세우고, 여기에서 평생을 강의 · 연구 · 저술에 몰두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 노트이다.

그의 연구는 광범하여 철학을 이론 · 실천 · 시학(詩學)의 3부로 나누어, 실천철학에서는 개인과 사회인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고, 덕은 중용(中庸)에 있다고 하였다. 시학에서는 예술의 본질을 다루었다. 이론철학은 그런 바탕으로 구성하고, 실재(實在)의 변화를 다루는 자연학과 비질료적(非質料的)이지만 실재도 아닌 수를 다루는 수학과, 실재와 불변성을 특징으로 하는 제1원인을 다루는 신학으로 구분된다. 이상의 세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이 논리(오르가논)이다. 그는 밀레투스학파 이래 철학자들이 추구한 원리에 대한 역사를 검토하고 자연철학자들이 사물의 주요원인으로 본 질료(質料)[근본물질] 외에 더 중요한 원인이 있어, 그 질료를 일정한 사물로 이루게 하는 원리로서의 형상(形相, 에토스)이 있다는 것을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설에서 배웠다.

그러나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에토스)를 질료에서 떨어져 존재하는 추상적 초월적인 실체로 본 것과는 반대로 그는 형상을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로 보고, 모든 존재를 질료와 형상과의 분리되지 않은 결합으로 봄으로써 그는 인간에 가까운, 감각할 수 있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이 설명방법을 천체(天體)로부터 기상계(氣象界) · 생물계 · 인간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에 적용시켜 고대의 최대 학문체계를 세웠다. 그는 모든 발전을 질료와 형상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일체의 변화는 새로운 것을 생성케 하는 원인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우리가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는 아무것도 정신적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인과적인 설명에 있어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변화의 종국적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라면 안 되고, 변화의 종국적인 원인 그 자체는 불변적인 것이어야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에 있어, 이 종국적인 것은 실재적으로 보면 그 자체가 최초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변화의 제1원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불변적인 것이므로 자체 속에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철저한 현실성(순수 현실)이며 모든 본질적인 것의 출발점으로서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형상이고, 형상과 질료의 합성이 아닌 유일의 것이다.

제1질료는 신과 함께 영원한 옛날부터 순수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다른 사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가치는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신은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가장 완전한 존재이다. 신의 활동은 최고의 것이며 완전한 활동이고,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독립한 사유, 순수한 ‘관조’(觀照)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위대한 철학자가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의 이교적 사고방식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그를 훌륭한 철학교사로서 친교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학문적 서술, 특히 술어적(術語的) 정돈을 위한 방법과 체계화가 그의 업적에 힘입어 이루어졌던 것이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사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특히 환영한 점은, 첫째 실재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이며 다음은 유신론적 세계관의 바탕을 그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세계창조의 개념과 세계의 시간적 시발의 상정(想定)이 없고, 그가 말하는 신은 세계에 대하여 오직 최고의 운동원인으로 작용하는 데 불과하지만,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 유신론의 정신으로 쉽게 바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영혼론도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고도의 이성의 불멸성을 인정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그가 세계를 하나의 질서(ordo)로 해석한 점은 특히 그리스도교적 사상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질서의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도덕원리와 사회조직의 유도(誘導)방식도 그런 세계관과 조화되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것이 스콜라학에 의해 계승되고 완성되었다.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아우구스티노주의자 간에 열띤 논쟁도 있었으나 아우구스티노의 발랄하고 활기찬 방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카데믹한 방식이 잘 결합됨으로써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풍요하게 꽃을 피운 것이다.

[참고문헌] The Encyclopedia of Phylosophy, Macmillan and Free Press, 1980 / New Catholic Encyclopedia, Washington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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