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신 1949년 11월 21일, 논산에서

 

제 4 신 1949년 11월 21일, 논산에서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친한 모든 이에게

 요즘에는 흐믓한 일들이 많군요!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8월 말에 항공으로 보내신 편지를 9월 초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이곳 주소는 여러분들에게 부쳐 드린 작은 주소표였지요. 그런데다가 10월 12일 에 데레즈가 일본에서 8월 6일에 발송한 편지와 그 안에 동봉되어 있던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약 열흘 전에는 역시 주소표가 봉투에 붙여 있는 뽈과 자네트로부터 아주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모든 소식들이 좋은 소식들이라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 동안에 항공으로 부쳐 보낸 나의 편지들을 모두 받으셨으리라 믿어집니다.

 요즘에는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수선 11월 2일부터 본단 구역 안에 있는 공소들을 순회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보기 위해서 토요일에는 성당으로 돌아 왔지만, 조금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합니다. 11개의 마을을 방문해야 하는 데 하루만 머무는 마을도 있고, 2-3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마을도 있습니다. 신자들의 수에 따라서 이렇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온돌 바닥에 누워서 자고 신자들이 갖다 주는 밥을 먹으니 좀 피곤하긴 하지요. 그런데다, 심하지는 않지만 영 멈추지 않는 설사병에 걸렸지요. 그래도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내가 있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분이 원하시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방문한 공소는 은진 읍내에 있는 공소입니다. 읍내라고 하는데, 외관으로 볼 때에는 본국의 가장 작은 마을만 못하면서도, 인구가 많은 곳입니다. 이 곳에서 미사를 3번 지냈고 모든 교우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그들 모두에게 교리 찰고를 받았습니다 다만 한두 명의 냉담자가 고집을 부리고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이 점점 많아지므로 공소집 주인이 불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작은 성당과 신부를 위한 방을 따로 지어 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내 나름대로의 경제적 부담을 해야만 하겠어요. 그 곳 대부분의 교우들은 교리 공부를 하지 않았더군요.

 주일을 보러 성당에 돌아 왔다가, 주일 다음 날인 12월 3일12)

에는 다섯 군데의 다른 공소를 순회하기 위해서 다시 나갔습니다. 월요일날 상마루 공소로 갔는데 25명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교리 찰고를 했습니다. 옹기 공장이 있는 마을이라 발전의 개연성이 거의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옹기장이들이 너무도 이사를 잘 다니기 때문이며, 또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술을 지나치게 마시기도 하고 말다툼을 자주 하기도 해서 표양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리를 아주 잘 알아요.

 화요일 날 하마루 공소로 갔는데, 그 곳 주민들 역시 옹기장이들이며 그 중에는 품행이 좋지 않는 몇몇 집들이 있습니다. 제대 밑에 설치된 두 사람이 들어 누울 수 조차 없을 만큼 좁은 골방과 비슷한 자리에서 잠을 잤어요.

 수요일 날 돌분리 공소로 갔어요. 대부분 농사를 짓는 이 곳 사람들은 전에 다녀 본 두 마을 사람들 보다 낫지요. 교회 발전 가능성이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높은 산기슭에 자리한 이 동네는 먼 옛날부터 신자들이 있던 동네이지만, 신자 수는 많지 않아요. 고백성사 대상자는 30명에 불과합니다. 재산이 약간 모이기만 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요일 날, 연산 읍내로 갔습니다. 이 곳에도 옹기 공장이 있는 동네에 공소가 있습니다. 이 곳 신자들은 교리 공부를 하지 않아서 화가 좀 났지요.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는 금식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며칠 동안 계속해서 쌀밥만 먹다 보니 그것에 싫증이 나기도 했기 때문에 금식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며칠 동안 계속해서 쌀밥만 먹다 보니 그것에 싫증이 나기도 했기 때문에 금식이란 일종의 휴식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이렇게 솔직히 이야기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국 저녁에 가서 공소 회장이 용서를 청하면서 다음 번 공소 방문까지 아이들을 잘 가르치로 약속했습니다.

 금요일 아침에는 양산 공소를 향해 갔습니다. 산 속 깊이 파묻혀 있고, 고백 대상자가 15명 밖에 되지 않는 아주 마음에 드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 곳으로 가려면, 구불구불한 길로 오랫동안 올라가야 합니다. 좀 서둘러서 고백성사를 다 주고 교리 찰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곳은 참으로 장관이었는데 저 멀리에 논산도 보였지요.

 토요일 날 본당에 돌아왔고 주일날은 점심 식사 후에 갈매올 마을을 향해 갔습니다. 이 곳은 4일 동안 머물러야 할 만큼 일거리가 있었습니다. 120명의 고백 대상자가 있으며, 옹기장이들이 많이 사는 큰 동네입니다. 경당이라고 하는 작은 성당이 있을 만큼 열심한 신자들이 사는 공소입니다. 경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열성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들어가기 2-3킬로미터 앞에 마중 나온 아이들도 있었고, 2킬로미터나 1킬로미터 지점에 나온 아이들도 있어서, 그 동네에 들어 갈 때에는 내 자전거를 붙잡고 있는 한무리의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공소에 도착 하였습니다. 선교사의 인생에 있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곳 아이들은 교리 공부도 잘 합니다. 내년 봄이되면 교리 문답을 완전히 암송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장엄한 영성체식”에 참가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모든 신자들이 강당, 제대 앞의 바닥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질문에 응답하기도 합니다. 부모들도 그곳에 함께 하여 무척 재미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가족적 분위기 속에 한두 시간을 보낸 다음, 모두 함께 공식 기도문에 따라서 저녁 기도를 바칩니다. 고향집에서 하는 기도보다 긴 이 기도를 모두가 암송하는 것입니다.

 목요일 날, 산 중에 있는 쇠목이라고 하는 또다른 공소를 향해 갑니다. 이 곳 신자들은 대부분 좀 무식하면서도 순진한 농민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들만 생각하고 외교인들의 입교와 구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25명에게 고백성사를 주고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 그곳에서 5-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옛날 성당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옛성당으로 가려면 꽤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야 합니다. 이 고개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대전교구와 전주교구 사이의 경계선이 되는 곳입니다. 그 옛날 성당은 “되재 성당”이라고 하는데, 그 주변 여러 본당의 “모본당”(어머니 본당)인 것입니다. 바로 옆인 강경 본당에 계셨지요. 박해시대에, 신자들은 이런 깊은 산골로 주로 피신했었지요. 그러다가 그 곳에도 박해가 일어나면 고개 넘어 단 시간내에 다른 행정 구역으로 다시 피난 갈 수 있는 잇점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 당시엔 교우들이 많아서 선교사들은 되재 같은 곳에 정착했었지만, 현재에는 되재에는 교우가 거의 없고, 성당은 무너질 지경이며 신부는 신자들을 따라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더 이상 오지 않는 본당이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두 분의 할머니를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주었고, 이튿날에는 다시 성체성사와 종부성사를 주기 위해서 그 집들을 방문했습니다. 이 할머니들의 건강이 악화될 때에는 본당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 곳까지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날에는 말목이라는 마을로 갔습니다. 이곳 신자들은 농사를 짓는 구교유들인데, 이들도 역시 외교인들에 대한 전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집의 주인이 좀 아파서, 식사도 변변치 못한 편이예요. 토요일 오전에는 날씨가 몹시 추웠지만, 자전거를 2시간 동안 타고 본당에 돌아왔습니다.

 다음 월요일인 11월 23일13)

에는 태틀 마을로 나갔습니다. 역시 농사를 짓는 구교우 마을인데, 전교에 약간의 열성이 있어서 몇 명의 예비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50명의 고백성사 대상자가 있는 공소입니다. 화요일 아침 첫 새벽에 은진으로 장례미사를 지내러 갔습니다. 신자인 면장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망인의 집에서 미사를 지내고 나서 태틀로 돌아갔습니다.

 수요일 아침에는 마지막 공소인 태밑 공소로 출발했습니다. 재미가 없는 공소입니다. 이 곳에 모이는 25명의 가난한 신자들은 5개의 마을에 분산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비신자들 가운데서 외롭게 살면서 일년에 단 2번밖에 사제를 만나 보지 못하는 이 가련한 신자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좀 생각해 주세요. 그들에게 하느님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요.

 11월 24일, 본당에 돌아오자 즉시 학교 일에 정신을 쏟아야 했습니다. 봉급을 올려 주지 않으면 파업을 하겠다고 교사들이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라리보” 주교님과 상의하러 대전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교사들의 요구 사항에 타당성이 있어서, 결국 그들의 월급을 4000원씩 올리기로 했지만, 이것은 1년에 96만원의 추가 지출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12월 8일에 주교님이 논산으로 오실 예정이었으므로 지금 견진식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공소를 제외한 논산 시내에만도 200명 이상의 견진자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110명이 교리 찰고를 받았는데, 아직 5일 간의 여유가 있거든요. 그런데 항상 그렇지만 대부분의 희망자들은 날이 임박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견진이 끝나면 성탄 축일 준비를 해야 하겠으니, 살 맛이 납니다.

 요사이에, 정확히 말하면 어제이었지만, 회장들은(회장이란 신자들의 대표라고 할까, 신자들 중에서 유지라고 할까, 하여튼 6명입니다) 나의 동의를 받아 가지고 사제관이 아닌 제삼의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안건이란 금전 문제였으므로 그들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나는 성사 집전과 강론 준비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거든요. 결과적으로 자기들의 교회 재정을 맡으려는 이 회장단은 첫째로 주교님께 미사 예물을 마치기 위해서 각 견진자에게 100원씩 내라고 요청하기로 하였으며, 둘째로는 각 신자 가정의 형편에 따라서 이번 성탄 안으로 500원 내지 1만원의 교무금을 내라고 요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요구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결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서 금방 태어난 이기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입니다. 신자들은 회장단의 이 결정을 그대로 받아 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본당 신부는 조금도 애쓰지 않아도, 그야말로 새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교무금을 잘 들어 올 것 같습니다. 고향 헤댕의 주임 신부님께 이 이야기를 하시면, 그분은 샘을 내시겠지요. 하여튼 이 곳에서 통용되는 원칙은, 교회 운영을 책임진다는 것이며, 신부는 감독하고 격려하며 지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마치 성령께서 하시는 것처럼, 신부는 지도하고 있는 신자들을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둡니다. 만일 신자들이 그들 신부의 생활을 부담하지 않을 때, 교구청에서는 그 신부를 불러 들여 신부를 원하는 다른 지역의 신자들에게 보냅니다.

 어머니 편지에 의하면 고향 성당 주임 신부님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다지만, 아직 그 분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우편 업무는 너무도 엉망입니다. 체신부장관은 작년에 로마로 갔을 대 같이 다녔던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대사관 참사관이었어요.

 어제 별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부인이었던 사람과 첩이었던 사람이 기일 연미사를 청하러 함께 왔었습니다. 둘 다 새로 영세한 사람들인데, 둘이 자매처럼 아주 화목하게 함께 살아요.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런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 친척 친구 이웃 중 어느 누구라도 잊을까 싶어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모두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라고, 모두가 즐겁고 보람된 성탄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바라며, 모두가 복되고 거룩한 새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모두를 사랑합니다.

삐에르 쎙제





이 글은 카테고리: TN-history-C1, 교회 역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