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신 1950년 7월 22일, 논산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모두에게
살아 있습니다…. 7월 14일 논산에서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그곳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어요. 가진 것을 다 잃었으니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신자도 없고 성당도 없고요…. 자전거를 타고 논산을 떠났는데, 광주까지 거의 200키로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광주로부터는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7월 21일에 부산에 도착했어요. 도로에는 피난민들이 떼를 지어 가고 있어서 그 모습이 1940년, 5, 6월 프랑스 주민들의 집단 이동을 연상케 합니다. 부산에 도착해 보니 프랑스인 신부 5명, 미국인 신부 2명, 그리고 아일랜드인 신부 24명이 피난해 와 있었습니다.
공세를 취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가지게 될 때까지, 미군들은 다만 남한의 동남부만을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미래는 대단히 희망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군들은 전쟁에 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이 치르어지고 있는 곳은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산군들은 너무도 많은 만행을 저질렀기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적당한 사람들입니다. 갈아입을 옷도 볼만한 책도 없이, 논산으로 돌아 갈 수 있는 승리의 날을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돈, 옷, 식료품과 구호품 등을 준비해 주시고 마르세이유시 노 거리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연락소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논산을 떠나기 전에 성작과 갖가지 성구, 그리고 제대포와 같은 것들을 땅 속에 묻어 숨겨 두었지만, 그것을 다시 찾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현재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습니다. 피난길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눈에 보이도록 그분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심은 확고부동합니다. 두 분 신부님의 충고에 따라서, 성체를 다 배령한 다음에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논산 성당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렇게도 가톨릭 교회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틀림없이 피살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투옥되었을 것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신자들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신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사도 바오르 성인이 하신 것처럼, 무슨 바구니 속에 숨어서16)
, 현대식으로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17)
처럼 다른 것으로 피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그러니 나를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피난길에서 가장 힘든 것은 38도나 되는 더위였습니다. 피난 떠나기 전에 가까운 거리에 계시는 “베르몽” 노인 신부님을 찾아갔었는데, 그분은 말라리아 병으로 고통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연세와 제반 상황으로 보아서 그분께 종부성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하느님과 교우들을 생각해서 제발 피난가시오. 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깁니다. 어떻든 나를 걱정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후로는 그분의 소식18)
을 전혀 듣지 못했어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며 포옹합니다. 그리고 실망하지 맙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 모든 것에 너무 집착해 있었지요. 물질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빨갱이들이 여기까지 내려 올 것 같으면 우리는 일본으로 피신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호해 주실 겁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논산을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포도주와 미사주를 다 마셔 버리지 못한 바로 그것입니다. 그 포도주를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은 너무도 원통한 일입니다. 이 곳에서는 하루에 2번씩 식사하고 맨 땅에서 잠자곤 합니다.
삐에르 쎙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