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신 1950년 8월 24일, 논산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부산으로 피난 온 지가 거의 한 달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실정입니다. 다행히도 7월 31일자의 그 반가운 편지와, 고향 성당 주임 신부님과 뽈과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편지들과, 데레즈가 최근에 보내준 편지를 잘 받아 보았습니다. 현재의 나의 형편과 논산에서의 탈출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동안에 매일매일 적어둔 일기를 그대로 베껴 드립니다.
6월 25일
찾아온 “몰리마르”22)
신부와 함께 잡담도 하고 카드놀이도 하였다. 밤 10시 30분경,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그분은 역으로 가시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11시 반경 그분이 돌아오셨다. 기차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차가 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이 처음인데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6월 26일
대건중학교는 3일 동안 휴교란다. 북한군들이 38선을 넘어와 의정부까지 진출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신문에 의하면 북한군들은 동쪽 중앙 서쪽 세군데로부터 진격했단다. 국립 경찰이 나를 소환했기에 본당 회장을 경찰서로 보냈는데, 거기서는 경보기가 (즉 경적이나 싸이렌) 울리면 소등하라는 등 공습에 대한 대비책을 갖추라는 지시를 받아 왔다. “베르몽” 신부님과 “몰리마르” 신부님이 와 계시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 화제거리는 미군들의 진출 여부였다. 군용 열차 5대가 지나갔다. “베르몽” 신부님은 강경 본당으로 돌아가셨다. “몰리마르” 신부님께 집을 맡겨 놓고 밤 11시15분에, 지난날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동안에 교리도 배우고 세례도 청한 환자를 방문하러 갔다.
6월 27일
철도운행이 전무하다. 비행기 몇 대가 왔다갔다한다. 결핵에 걸린 식복사에게 한 달간의 유급 휴가를 주어야만 했다. “몰리마르” 신부는 자기 본당인 금사리로 돌아가셨다.
6월 28일
특이한게 없다. 서울 성가수녀회 수녀원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물론 가지 않았다.
6월 29일
북한군들이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고 남한군들은 서울 남쪽23)
에 있는 한강 다리 4개를 폭파시킨 뒤 남쪽으로 후퇴했다는 소식이다. 점심 식사 후 안절부절못해서 , 강경으로 “베르몽” 신부님을 찾아갔다. 들려오는 소식들은 과히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미군들의 진격을 예고했다(발표했다라고 할 수도 있음). 과연 편대 비행ㅇ르 하는 비행기들이 여러 번 지나갔다. 미 군함들이 해안을 경비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의 상륙도 막고 있단다. “베르몽” 신부님은 몸이 약간 불편하신듯하다. 논산 본당으로 돌아와,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을 때, 온갖 짐을 가지고 그들의 식복사와 그 부인을 데리고 온 아일랜드 신부 두 분이 차편으로 도착했다. 이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투숙하는 첫 번째 피난민들이다. 이 한국전에서 “트루만”이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대건중학교에서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럴 수가 없지 않는가? 이것은 잘못된 정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
서울에 계신 미국 신부님들은 6월 26일 항공편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한다.
6월 30일
미사를 지내고 난 다음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몰리마르” 신부는 몇 가지 소지품을 찾으러 오셨다. 다소간 허위적 온갖 소문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것, 북한군 2000명이 투항했다는 등 그런 소문들인데, 라디오에서는 역습 준비 중이라고 할 뿐이다. 오후 한 시에, 저공 비행하는 비행기가 “한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멕아더 장군의 담화문”이라고 하는 호외를 뿌리면서 지나갔다. 라디오에 의하면 남한군들이 2개의 읍을 북한으로부터 탈환했다고 한다. 탱크를 몰고 온 북한군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서울의 극장 건물들 속으로 피했단다. 저녁에는 “몰리마르” 신부님이 서울의 극장 건물들 속으로 피했단다. 저녁에는 “몰리마르” 신부님이 계시는 본당 출신 신학생이 서울을 탈출해서 도착하였다. 이곳 출신 신학생 3명이 곧 도착하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서울을 떠나 무사하다는 소문이다. 서울 근교에는 도로들이 피난민으로 메워 있어서 프랑스의 1940년도 5-6월과 같은 상황이라고 한다. 서울에서는 각 성당에 신부 한 분씩만 남아 있을 뿐 다른 신부들은 모두 피난갔다고 한다. 6월 27일 탱크를 몰고 온 북한군들은 기관총을 쏘아 주민들을 겁나게 했단다. 앞으로 닥쳐 올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든 내일부터 피난민들을 맞아 들일 준비를 해야겠다.
7월 1일
비가 많이오기에 작전이 중단되겠지. 그러나 구름 위에 지나가는 미군 비행기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비 때문에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에 지장이 생겼다. 불가불 쌀을 비축해 두어야 할 것이다. 어제 은행에서 40만원을 인출하는데 간신히 성공했지만 오늘은 은행에서 돈을 한 푼도 찾아오지 못하였다. 역시 돈이 없어서 대건중학교에서는 교실 공사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방학을 줄 것에서는 교실 공사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방학을 줄 것만 같다. 대전으로 내려 와 있는 정부는 미군들이 자유롭게 작전할 수 있도록 전주로 후퇴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저녁에는 윤 필립보 신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도착하였다.
7월 2일(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
주일이므로 미사를 33대 봉헌하였다. 미사 때마다 전쟁에 대해서 강론을 하였다. 이 전쟁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징벌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참회의 계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미사 동안에 먼 곳에서부터 폭음이 들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경에 있는 발전소가 폭발했다는 소문도 있다. 전기가 단전되어서 라디오24)
를 들을 수 없다. 소식이란 주민들이 전하거나 오열들(불순분자들)이 유포하는 소문 뿐이다. 상황이 위급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겅찰에서 성당종을 치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 다시 들어 갈 수 있다는 소문도 있고, 강영발전소 폭격이란게 사실무근이며, 다만 지나가는 비행기가 3개의 빈 휘발유통을 떨어뜨렸을 뿐이라는 소문도 있다. 과연 전기불이 다시 들어 왔다. 그 결과로 희망도 기쁨도 모두가 되찾을 수 있다. 교리 학교 확장 공사와 성당 지붕 칠 공사가 오늘 끝났다.
7월 3일
강경성당 베르몽 신부께 다녀 왔다. 별다른 일이 없다. 이곳 출신의 또 다른 두 신학생, 즉 조 안또니오와 최 바오로가 밤중에 도착했다. 둘 다 건강하고 무사하여서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공베르”25)
두 형제신부는 서울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나, “꼬요스”(한국명 : 구인덕) 신부와 “비에모”(한국명 : 우일모) 신부26)
는 무소식이다.
7월 4일
피난민들이 도착했다. 어느 가족에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었다. 오후 2시 30분경, 피난민들이 탄 기차가 도착했다 천장이 없어 몹시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받는 화물칸인데, 피난민들 가운데서 나무가지를 꺾어 그늘을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줄 것인가? 지금까지 그들은 체면을 차리느라고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았고, 나도 식사를 제공해 주겠다고 감히 자청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떼지어 먹을 것을 얻으러 오게 되면 있는 것을 단번에 소비해 버리고 남는 것이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전 비행장 부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즉시 철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7월 5일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의 축일을 처음으로 따로 지냈다. 대미사도 지내고 한국을 위한 특별기도도 하였다. 24시간 이내에 북한군들이 철수하지 않으면 원폭을 투하하겠다고 트루만 대통령이 위협했다는 소문이 퍼진다. 트루만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이것은 또한번 헛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지키는 침묵과 더불어 근심스러워 보이는 모습은 전반 분위기를 가일층 불안하게 한다. 피난민들의 짐을 실은 차량들이 남쪽으로 향해 지나갔다.
7월 6일
새로운 소식이 없다. 군인들을 많이 태운 차들이 지나갔다. 군인들 가운데 부상자들이 있는 것 같지만 확인해 보지 못했다. 계속해서 도착하는 피난민들….
7월 7일
오후에 2발의 대포 폭음이 들려온다. 소나기가 쏟아질 듯한 무더운 날씨다. 라디오에 의하면 충주와 홍성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북한군들이 상당히 진군하였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미군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기저하?
7월 8일
특기 할만한 것이 없다.
7월 9일
오전 11시에 신학교 학장인 정규만 마르코 신부는 신학생 7명을 데리고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도착하여 미사를 지내고 식사를 하였다. 저녁에는 천안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역시 저녁에 장호원 지방 출신 박고안 프란치스꼬 신부는 다른 신학생 한 명을 데리고 도착하였다.
7월 10일
아침 식사 후, 신학생들은 전주를 향해서, 박신부와 정신부는 대전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나는 말라리아로 앓고 계시는 “베르몽” 신부님을 만나러 강경으로 갔다. 본당에 없는 사이에, 미국인 신부와 아일랜드인 신부 여러 명이 들렀고 편지 여러 통을 두고 갔다. 저녁에는 정신부와 박신부가 돌아 왔다. 미군 탱크들이 성당 바로 뒤에 있는 부창국민학교 운동장에 자리 잡았다.
7월 11일
정신부와 박신부는 나바위본당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오후에는 굉음을 내면서 여러 대의 비행기들이 지나갔다. 부르릉 소리가 아닌 이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저녁에는 다른 피난민들이 도착하였다.
7월 12일
천안이 수복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어제부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라디오를 들을 수 없어서 소식이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전투 중 몇몇 북한군들이 예산쪽과 부여 (“몰리마르” 신부님이 계시는 곳)쪽으로 진격했다가, 마침내 격퇴되었다는 이야기가 잇다. 그것이 사살이라면 예사도 논산도 곧 공격을 받게 될 것이지만, 지금까지 대포소리를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서울에서부터 산길로 걸어온 가엾은 피난민들이 또 도착했다.
7월 13일
전에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이셨고 현재 공주 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시잘레” 신부는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 왔다. 공주는 논산과 천안의 중간 쯤에 있는 도시이다. 최후의 순간이 되어야 피신하겠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 분이라서 몹시 놀라기도 했고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주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미군들이 참전하고 있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 그분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다.
7월 14일
소식들이 비관적인 것이어서, 성작과 같은 귀중품을 땅 속에 묻게하고, 쓸데없는 서류들을 태워 버렸다. “시잘레” 신부가 공주로 돌아갔으므로, 강경에 계시는 “베르몽”27)
신부님을 찾아갔다. 그분은 쓰러진 일이 있어서 지난 3일동안 식사를 전혀 못하셨다. 제반상황이 심각하고 연세가 많은 분이라서, 종부성사를 받으시는 것이 어떻냐고 하니, 그분은 받겠다고 하셨다. 그곳 성당 감실의 성체를 다 배령했다. 그분은 가지고 게시던 “딸라”를 건네 주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제발 피난가시오. 나를 걱정 마시오.” 하셨다. 금강 변에 있는 강경을 떠나, 논산으로 돌아왔는데 강경을 떠나자마자 주민들에게 피난가라는 당국의 명령이 내려졌다. 집에 돌아오자, 빨갱이들이 공주를 장악하고 논산을 향해 오고 있다는 발표가 있었다. 집에 없는 동안에 수녀들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피난가 버렸다. 긴급한 상황이 되니까, 고백성사와 심지어 세례성사까지 청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도 급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소지품을 안전하게 감추어 놓고 싶지만, 이미 너무 늦었을 뿐 아니라, 이제 나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피난가고 있다. 그리고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온다.
저녁에는 논산의 고급공무원인 박창래씨가 돌풍처럼 사제관에 돌입하여 “신부님 고백성사를 좀 주세요. 모두가 피난가니 저도 떠나렵니다.”고 하였다. 그는 어린애처럼 우기만 하는데, 여러해 동안에 고백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자들도 피난을 가라고 하고 “시찰레” 신부도, “베르몽”신부도 마찬가지로 피난을 가라고 하여 결국 저녁 7시경에 2명의 신학생을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피난가지 않겠다는 김명제 베드로 신부에게 성당과 모든 소지품을 맡겨 두었다. 피난가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비겁한 짓은 아닌지? 아무튼 커다란 모험이 시작되었다 길모퉁이에서 성당 종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다가, 논산에서 약 30리 거리에 있는 태틀공소로 갔다.
7월 15일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 태틀공소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청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그곳을 떠나 여산, 익산, 삼례를 거쳐 전주로 갔다 전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대성당에서 3시간 동안 쉴 수 있었다. 김현배 발토로메오 교구장은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피난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원평리의 어느 신자집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200리 이상을 달렸다. 그것은 출발한 후 가장 오래 달린 구간이 될 것이다. 날마다 하는 성무일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찌는 듯하게 더운 날씨인데다, 마음이 매우 심란하다.
7월 16일
허약해지고 매우 지친 채, 신학생들을 데리고 정읍까지의 70리 길을 갔다. 일요일이지만, 미사도 못 지내고 성무일도도 하지 않았다. 점심 때 정읍 성당 사제관에 도착해서 잠을 잤다.
7월 17-18일
다소간 위급한 상황이라는 경보가 여러번 있지만 정읍 성당 주임신부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이곳에서 그대로 쉬었다. 대전에 관한 소식들은 비관적이다. 미군들은 싸우려 하지 않은 듯하다.
7월 19일
더욱 나쁜 소식만 들려와 정읍을 떠나 남쪽 행정구역인 전남 안에 있는 장성을 향해 갔다. 이제 와서 피난이 상책이라고 말하는 정읍 성당 주임 신부도 우리와 동행하였다. 도중에 높은 고개가 있어서, 나로서는 한동안 멈추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무시무시한 더위와 힘든 일로 내 심장이 심하게 뛰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고개 맨 꼭대기에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시원한 샘물을 솟아오르게 해 주셨다. 오후 4시경에 장성에 도착하였다. 사제관도 성당도 아주 넓었고 한동안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7월 20일
광주를 향해 갔다. 광주에 도착하니 우리들의 운명이 그곳28)
신부님 의사에 달려 있었다. 서남쪽으로 즉, 목포로 가는 것이 좋으냐? 동남쪽인 부산으로 가는 것이 좋으냐? 신부님은 나에게 부산으로 가라고 하신다. 부산에는 프랑스인 신부 여러 명이 이미 와 있다고 덧붙여서 이야기 하신다. 우리는 그 신부님의 지프차로 떠났다. 광주 시내 회장과 그의 아들, 그리고 어느 아일랜드인 신부와 함께 떠났다. 할 수 없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두 신학생과 헤어져야만 했다. 내 자전거를 조 안또니오 신학생에게 주었고, 또 신학생 각자에게 2000원씩 주었다. 밤이 어두워졌을 때 어느 본당29)
에 도착해 보니 사제관이 이미 비어 있었다. 이곳 주임 신부도 이미 피난간 것이었다.
7월 21일
미사 후에 박창래씨를 포함해서 논산에서 이곳까지 온 몇몇 신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데서 온 피난민도 많았다. 우리는 부산을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에 보니 진주를 향해 가는 군인들이 많았다. 풍경으로 볼 때 너무도 멋진 여행이지만 자갈때문에는 너무도 괴로웠다 이 자갈 투성이의 길은 너무도 험난한 데다가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진주 성당30)
사제관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저녁 7시 30분경에 부산에 도착해 보니 대전에서 내려온 “보드뱅”, “차보”, “조제”, “뽀요” 신부님들과 공주에서 내려온 “시잘레” 신부님이 이미 와 계셨다. 이분은 7월 14일 오전에 논산을 떠나 공주로 돌아가려고 하셨던 것이지만, 도중에 저지를 당하여 어느 사람 집에 오토바이를 두고 걸어서 공주 시내로 들어 가셨다. 목적은 몇 가지의 소지품을 가지려 하신 것이었다. 그 때에 공주 시내에 여러 군데서 화재가 나 있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는 저녁에 논산으로 다시 왔지만, 도착한 시간은 내가 출발한 30분 후였다. 아무튼 부산에서 이렇게 여럿이 서로 만났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합덕의 “베랭” 신부, 공세리의 “불또” 신부, 천안의 “볼리”31)
신부와 서울의 신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전이 함락되었다는 불길한 소식이다.
7월 29일
비가 온다. 상자들, 보따리들, 가방들이 쌓여 있는 좁은 방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인데 더군다나 비가 올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모기가 극성을 부리지만 모기장도 없다. 이상하게도 이곳에 도착한 며칠 후에 장항에 계시던 “프로망뚜” 신부가 내가 온 바로 그 길로 해서 이곳에 도착했다. 광주에서 신학생에게 맡겼던 자전거를 그 신학생이 가져왔기에 그것을 타고 가끔 외출한다.
부산에서 어떻게 소일을 하느냐 하면, 날씨가 매우 더워서 바다로 내려가 수영도 하고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에 올라가 선박들의 출입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탱크, 트럭, 기관차 등등 미군들의 거대한 장비에 대한 하역 작업도 구경합니다. 그리고 카드놀이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탱크, 트럭, 기관차 등등 미군들의 거대한 장비에 대한 하역 작업도 구경합니다. 그리고 카드놀이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우리들과 함께 7명의 아일랜드 신부도 있는데, 아주 능란한 이들은 온갖 미제 통조림을 갖다 줍니다. 식사 문제에 있어서는 그저 만족합니다. 밤에는 매우 더워요. 모기장이 없어서, 모기들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차차로 밤이 시원해집니다. 이불도 없고 옷도 없어서 약간 걱정스럽지만, 하느님이 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전쟁은 곧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 근처에서 빨갱이들은 병력도 많이 잃고 사기도 많이 떨어진 것 같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하실 수 있는 데까지 성인 독신 남자의 살림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는 것, 즉 홑이불, 양말 같은 것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실은 여기서 그것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돈도 없거든요.
끔찍하고 비참한 일들이 넘칠 만큼 많습니다. 몇 명에게라도 세례를 줄 수 있을까 해서, 가끔 군인병원을 찾아갑니다. 소름 끼치는 광경을 봅니다. 중상을 입은 수천명의 그 불쌍한 군인들이 맨 땅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 중에 배나 방광에 관통상을 입은 사람도 있고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도 있는데 위생 환경이 형편없습니다. 만일 리제뜨가 이 광경을 보았을 경우에는 속이 뒤집혔을 것입니다. 총알이나 포탄으로 부상한 피난민들도 입원해 있는데, 피난 도중에 6명의 아이를 잃은데다가 말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이 총상투성이인 사람도 있습니다. 죽어가는 이 어머니 옆에는 남은 두 아이가 울고 있는데 울고 있는 이유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배도 고프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국이 당하고 있지만, 아마도 유럽이 당할 차례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소련이 30사단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5개의 사단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를 특히 어머니를 사랑하고 포옹합니다.
편지를 보내실 수 있는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쎙제 신부 – 가톨릭 선교단
미군 우편국 59호
경유 :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치스꼬시 우체국장
비고 : “부산”이란 말을 쓰지 마세요.
삐에르 쎙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