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신 1951년 1월 25일, 논산에서

 

제 13 신 1951년 1월 25일, 논산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모두에게

사는 게 왜 이렇게도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 1월 5일 저녁에 다시 부산을 향해 피난을 떠나야만 했고 그 이튿날 저녁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체로 피난 온 것인데 트럭을 타고 왔으며 우리 소지품도 가져왔어요. 소지품이라고 해 봐야 별로 남은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나는 요와 이불 등의 침구를 가지고 올 수 있었는데 한 달 전에 일본 동경으로 주문한 옷가지들은 바로 이곳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피난 온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 때문에 망신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빨갱이들이 대전까지 내려오지도 못했기 때문이고 또 지금 미군들이 정신을 차려 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우리가 당한 피해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임지에 그대로 남은 이들은 모두 피살되거나 포로로 잡혀갔으나까요. 그래서 이번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리 피난 온 것입니다. 평양교구, 서울교구, 전주교구 신부들이 몽땅 부산으로 피난와 있습니다. 1940년 5월-6월 프랑스 북쪽에서 있었던 덩케르크 사태와 비슷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 우리 소지품의 일부라도 안전하게 일본으로 수송하기로 한 우리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은 나에게 그 일을 맡아서 하라고 하셨지만 사태가 호전되려는 것 같아서 나의 일본행 여행은 연기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일본식 집의 구조는 별지에 그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주로 카드놀이로 시간을 보냅니다. 이따금씩 포로 수용소나 미군 부대를 찾아가서 성직을 조금이라도 수행하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할 일이 너무 없고 생활이 너무 무료해서 어느 미군 군종 신부가 해 온 제안을 수락할까 합니다. 그 제안은 140명의 포로를 맡는 신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포로들은 곧 어느 섬으로 이송될 예정인데 그들의 사목을 맡게 된다면 나도 그들을 따라 그 섬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곳에 가게 되면 별도의 숙소를 가질 것이고 이 수용소 저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교우들을 모아 놓고 고백성사도 주고 미사도 집전하고 교리를 배우려고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될 것입니다. 실은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좀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약간의 적대감이 그들과 나 사이에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부산에서 좀 멀리 떨어진 섬이요, 나 혼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인 그들은 호감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콩나물시루처럼 좁은 공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은 증오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국인 군종 신부는 가장 좋은 자리에, 즉 부산에 있는 포로들을 위한 병원에 그대로 있으려고만 합니다. 그분이 혼자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힘에 벅찬 것입니다.

한국인 사제를 채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나에게 그와 같은 제안을 했으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만 있습니다. 바보스럽게 이용만 당하게 될 것이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어머니께서 1950년 12월 27자로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안녕하다니 다행입니다.

성가소비녀회 수녀원은 잘 발전해 갑니다. 수녀들도 피난을 가야만 했는데 그 중에 10명 정도는 부산으로, 또 10명 정도는 제주도로 가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내일은 이곳에서 100리 떨어져 있는 어느 한국 병원에 5명이나 되는 사람을 취직시켜 보려고 합니다. 그 병원 근처에 있는 어느 미군부대에 미사를 지내러 가게 되었으니 그 기회에 그 병원을 찾아가 취직 알선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동란에 수녀 2명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다른 2명은 빨갱이들에게 감금되었다가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매일 미제 통조림을 먹고 살아가는데 이와 같은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 할 것 같기만 합니다. 언제쯤에야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날씨가 어지간히 추워졌지만 이곳이 남쪽 지방이라서 밤이면 서울보다는 덜 춥습니다. 그러나 포로니, 군인이니 모두가 추위에 고생을 많이 합니다. 부산에는 지난 여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피난와 있습니다. 당국에서는 이 피난민들을 배편을 이용해서 인근 도시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 3000개의 섬이 있다니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고나 할까요? 지금까지 남쪽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들이 있는 북쪽에는티푸스병이 번지고 있답니다.

나는 “베르몽” 신부님과 함께 이 근처에 여러 번 산책 나갔습니다. 바다도 있고 산도 있어서 풍경이 매우 아름답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귀에 동상이 날 뻔했습니다.

여러분을 자주자주 생각합니다. 각자에게 길게 쓰고 싶지만 서신 왕래가 여의치 않아서 참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빨리 왔으면 참으로 참으로 좋겠지만, 이곳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금년 어느 날에 터지고 말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특히 어머니를 포옹합니다. 그리고 모든 친척과 친지들에게도 인사를 보냅니다.

삐에르 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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