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10월 이후의 논산 지역 교계 현황

 

1861년 10월 베르뇌 주교(제4대 교구장)는 조선 전체를 8개의 본당 구역으로 나누었다. 이 때의 본당 구역의 설정은 한국 교회의 전교 활동과 사목 행정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병인년(1866년)의 대 박해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파견되었다.1877년 가을, 최지혁의 안내를 받아 리델 주교와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 등이 입국하였다.1880년 11월에 뮈텔 신부와 리우빌 신부가 입국에 성공한 후, 1881년에는 선교사가 모두 5명에 이르러 특정한 지역에 대한 전담이 가능케 되었다.



두세 신부는 충청도 지방을 전담했는데 현재의 총청남도 전역과 경기도의 남쪽 지방인안성, 평택 등이 그의 담당 구역으로 1890년까지 근 10년간 이 지역에서 복음 전파에전력을 다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열성적 전교로 모든 공소들을 빠짐없이 방문하였으며, 교세 확장을 위한 공소의 설립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교우수와 공소의 증가로 1890년까지 근 10년간 이 지역에서 복음 전파에 전력을 다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열성적 전교로 모든 공소들을 빠짐없이 방문하였으며, 교세 확장을 위한 공소의 설립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교우 수와 공소의 증가로 1890년(전국 신자 수 17,557, 본당 수 9)을 분기점으로 하여충청도의 북부 지방인 천안 등의 일부 지방은 파스키에 신부가 담당하였고, 공주와 충남의서남부 전 지역은 퀴를리에 신부의 관할이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특히 내포 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사랑과 믿음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온갖 정력을 다하였다.

이 후 교세의 확장과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소속 입국으로 충청도 지방은 점차 안정되면서 사목 활동이 지역적으로 세분화, 조직화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즉, 도 단위의 본당에서 소 지역 단위의 본당으로 분리되면서 교세의 꾸준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1893년으로 넘어오면서 은진 지역에 산재한 공소들은 진산 지역과 함께 비에모(Villermot) 신부의 전교 활동 영역에 포함되었다. 비에모 신부는 1892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 해 6월 입국하여 고산의 차돌박이(현 백석)에 근거를 두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은진 지역이 되재 본당을 모체로 한 전라도 지방의 포교 활동 영역에 해당되었다.

이 후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의 하나인 화산 본당(나바위 본당)이 1897년베르모렐(J. Vermorel) 신부에 의해 창설되면서, 은진 지역의 공소들은 화산 본당과 미알롱 신부가 맡고 있던 고산의 되재 본당에 나뉘어 소속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35명, 한국인 성직자가 12명, 교우 수는 42,411명이었다. 그 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1910년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46명, 한국인 성직자가 15명, 교우 수는 73,517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조선 대목구의 지역이너무 광활하고 성직자와 신도 수도 뚜렷하?증가하였으므로 교구를 분할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로 인해 1911년에 조선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리 설정될 때 교구경계선 문제로 인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11년 4월 8일자 교황 비오10세의 소칙서를 통해 조선 대목구로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분리시켜 대구 대목구를 설정하고, 조선 대목구를 서울 대목구로 개칭하였다.

드망즈(Florianus Demange)는 1911년 6월 11일(일요일) 뮈텔 주교로부터성성되었다. 그는 대목(代牧 : 교황대리 감목구장)이기 때문에 아드라스(Adras)의 명의(名義) 주교로 초대 대구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새 대목구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탁하였다. 이리하여 한국 교회는 만 80년만에 2개의 대목구를 갖게 되었다.



대구 대목구는 설정 당시 한국 교회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2만 6천명의 교우와 18개의 본당, 390개의 공소를 갖고 있었는데 충청도의 은진 지역을 관할하던 나바위 본당과 되재본당이 대구 대목구 소속이었다. 나바위 본당은 21개의 공소(은진 10, 여산 4, 용한 3, 석성 2, 연산, 노성 각 1)를 갖고 있었고, 되재 본당은 24개의 공소(고산 17, 진산, 진잠, 은진, 각 2, 연산 1)를 관할하였다.



1911년 4월 8일자 대구 대목구 설정에 관한 교황의 서한은 서울 교구와 새로 탄생하는대구 교구 사이의 경계선이 행정 구역상의 도(道) 경계선임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전라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일부 지역에는 아직 서울 교구 소속 본당이 없어 그곳에서 가장가까운 전라도 본당에서 충청도의 공소까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 원칙을 적용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대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서울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베르모렐 신부가 담당하던 나바위 본당과 베르몽(Bermond) 신부가 담당하던 되재 본당에 연결된 충청도의 은진, 석성, 노성,연산, 진잠의 5개 지역 공소들을 대구 교구에 양도할 것을 요청하였고, 뮈텔 주교도 이 요청을 기꺼이 수락 하였다. 이 때 두 본당에 연결된 충청도 지역 교우 수는 두 본당 총 교우 수 3,851명 중 1,392명이었다.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이들 5개 지역을 완전히 대구 교구에 편입시켜 그것을 경계선으로 확정하였다. 1912년에는 은진에 성당 대지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편입의 문제는 1912년 2월 29일 서울 교구 평의회에서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두 교구 사이에 10년간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 분쟁은 결국 로마에서의 결정에 의해 종식되었다.





※표1:1897년 나바위 본당이 창립되기 이전에 두세 신부가 설립하고 사목한 논산 지역에 산재한 공소들








공 소 명


설립 연도


당시 신자 수


현 지 명


삼 산

강 경 이

방 고 개

갈 매 울

곰 밭

새 룰

석 교 동

움 뜸

석 교 동

양 촌

가 지 매

대 하 리


1883(?)

1884

1885

1887

1887

1887

1887

1887

1887

1888

1888

1888


?

131

46

99

47

65

15

53

70

65

45

20


논산군 성동면 삼산리

 강경읍 강경상고

 은진(?)

 가야곡면 목곡리

 은진면 토양리

 광석면 사월리

 성동면 원봉리(?)

 강경 현 사제관 터

 강경읍 서창동

 가야곡면 양촌리

 채운면 심암리

 성동면 삼산리


 ※표2: 1897~1898년 당시 은진 지역 공소 현황(<천주교 대전 교구 통계 자료집>, p. 108~111.)








공소명


담당신부


교우수


현 지 명


관할본당


비 고


독각골

두강이

쇠 목

갈매울

대 티

강경이

등 리

댓 뜰


미 알 롱

 

 

베르모렐

 

 

 

 


68

32

44

141

23

113

14

47


논산시 연무읍 동산리

 가야곡면 야촌리

 양촌면 중산리

 가야곡면 목곡리

전북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

논산시 강경읍 강경상고

 가야곡면 등리

 연무읍 죽평리


되재본당

 

 

화산본당

 

 

 

 


 

두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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