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2역대기 24,18-22)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와 함께 있는 이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와 함께 있는 이는 선택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있는 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찬미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 참으로 나쁜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신하들에게 그의 침상에서 살해되는 비극을 격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이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던 아하즈야가 예후에 의해서 죽게 되자, 아하즈야의 어머니 아탈야가 유다를 통치하려고 집안의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왕자인 요아스를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몰래 빼내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탈야가 6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요아스는 하느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 사제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고, 아탈야를 체포하여 성전 내부와 통하는 왕궁의 입구에서 죽이게 됩니다.
여호야다 사제는 자신과 온 백성과 임금 사이에 계약을 맺고, 주님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바알신전을 허물고,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습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고, 아탈야가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습니다. 이렇게 요아스는 일곱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마흔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 사제가 죽자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어린 자신을 살려주고, 왕으로 세워준 공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야다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옆에 있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으며 하느님 백성을 통치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권위 있고 힘으로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섬기는 왕이었으니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신하들이 요아스에게 다가와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을 했고, 요아스는 그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아스는 배은망덕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6년 동안 살아가면서 아탈야의 칼에서 목숨을 건졌지만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사제 여호야다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는 여호야다를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요아스의 죄상을 이야기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요아스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요아스에게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사로잡아 말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하면서 아들을 보냈지만 결국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즈카르야는 알아주겠지.”하고 즈카르야를 보냈지만 요아스는 결국 즈카르야를 죽이게 됩니다.
요아스는 하느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잡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잘될 리 없고, 하느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아스 주변에는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요아스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주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요아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여호야다 사제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눌러야 했으니 좋아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죄상을 꼬집으니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좌우지간 배은망덕한 요아스는 자신을 살려주고,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성전 뜰에서 죽이게 됩니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배은망덕의 극치는 바로 요아스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가 자신이 받게 될 벌은 아직 생각하지 못합니다. 요아스는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쾌락에 찌들어 버리니, 하느님을 섬기는 엄숙함이나 고행 등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의 말에 완전히 귀를 막았던 것입니다.
남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죄를 다른 이들에게 덮어 씌워서도 안 되고, 내 욕망을 다른 이들을 통해서 충족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무죄한 이를 죽인다면 그 벌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착한 일을 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주님께 맡기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배은망덕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생각하지 않으면 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옥중에서 쓰신 편지의 내용처럼,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라는 말씀과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면서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아스와 같은 삶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