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몸소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닫혔던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루카9,51)라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몸소 희생제사를 드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 이유”는 바로 희생제사를 드릴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는 걸음”입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시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이고,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나의 발걸음도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아브라함처럼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탄식하며 걸어갔던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사마리아에서 묵으시려고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내셨습니다.(루카9,52ㄱ).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깊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루카9,52ㄴ)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성소를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만 가신다고 생각했기 떄문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보고서 제자들은 화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은 모욕을 당할 수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벌을 내리자고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그런데 능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헤친다는 것. 당연히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생각들은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형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해야지 사형시켜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없습니다. 생명에 관련된 것은 모두 하느님 영역임을 모든 이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모욕을 더 큰 모욕과 벌로 갚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지 파괴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파견되었으며,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빈다. 예수님의 마음은 비록 모욕과 매질과 더 나아가 죽음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결코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젊은 친구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껄껄 웃어 넘기셨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혼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건 예수님 정신이 아니라네…,”
사마리아에서 모욕을 받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그냥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상대방이 막고 있다면 돌아가면 됩니다.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면서 그것을 행할 필요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함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