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는 내가 얼마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가르쳐주셨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거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라는 직책으로 보아 이 불쌍한 부상자에게 당연히 동정을 가지고 돌보아 주어야 할 터인데 그는 못 본 체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사제와 함께 신명기에 있는 “너희는 동족의 나귀나 소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모른체 해도 안 된다. 반드시 동족을 도와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명22,4)고 한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쳐 버립니다.
아마 이들은 이 사람이 반쯤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레위21,1). 아니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강도들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단지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일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들을 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데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했지만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 중에서 사랑과 자비를 가장 많이 베풀어야 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만 유다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그를 보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고, 서로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가엾게 여깁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록 유다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초주검이 된 유다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이튿날,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루카10,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10,36)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편협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웃은 자신의 동족이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로 이웃임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ㄱ)라고 답을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대답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멋진 일을 했기에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옹졸하다.”고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