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고, 그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그 마음을 보셨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뵙기를 청했던 자캐오에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캐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자캐오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자캐오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을까요?
자캐오는 사람들의 야유와 작은 키의 신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을 보고 싶어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자캐오는 기쁨에 넘쳐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최초로 흔드시어 떨어진 새로운 시대의 잘 익은 무화과”였다고 표현하십니다.
자캐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집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유다인들은 모두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19,7) 자칭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고, 세리나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이들은 “저이가”라고 표현하며, 예수님을 죄인 취급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존경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집”은 누구의 집을 말할까요?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웃고,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죄인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공경 받아야 마땅하신 예수님께 “저이가”라고 표현하면서 모욕하는 이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죄인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 집이 바로 죄인의 집이고, 내 집이 바로 구원에서 멀어진 집입니다. 그리고 자캐오의 집은 의인의 집입니다. 나의 집 또한 구원이 머무는 의인의 집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캐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안 돼, 사람들의 눈도 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이런 모든 분심들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면서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주님께서는 꼭 들어주십니다. 자캐오가 응답 받은 것처럼 그렇게 응답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향할 때 예수님께서는 넘치도록 후하게 은총에 은총을 담아서 주십니다.
또한 의인과 죄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서 내 집이 의인의 집이 될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기도가 울려 퍼진다면 분명 의인의 집일 것입니다. 자비가 넘쳐난다면 분명 의인의 집일 것입니다. 사랑이 넘쳐 난다면 분명 의인의 집일 것입니다. 그렇게 의인의 집으로 만들어 주님을 모시고 기쁨의 생활을 해 나가 봅시다. 그런 마음의 나에게 주님께서는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