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사랑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밀밭 사이에서 가라지가 올라왔습니다. 가라지를 보자 종들은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13,27) 그러자 집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13,28)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종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 하지 않느냐고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13,28)밀들만 남겨두고 가라지는 뽑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집주인의 생각은 종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종들은 눈앞에 있는 가라지를 뽑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 옆에 있는 밀을 더 걱정합니다. 그래서 집주인은 이렇게 지시를 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13,29-30)
집주인의 생각은 가라지를 뽑아 낼 때, 밀이 다치지 않도록 둘 다 자라게 놔두는 것이었습니다. 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에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인의 모습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이유는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 때문이고, 모든 이들이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때 가라지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있고, 살아가면서 어떠한 불합리함이나 형제자매들 안에서의 위선을 보게 된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습들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를 단죄하기 보다는 그를 위해 기도해 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주인은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둘의 운명은 다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나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라지의 삶이라면 나는 결코 하느님의 곳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결정할 때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전환할 수가 있게 됩니다.
가끔은 고위직 직책에 임명되기 전에 청문회를 통해서 개인의 부적합함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런 줄 몰랐는데 막상 그 자리에 앉혀보니 쏟아지는 부족함과 비리가 홍수를 이룰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면 물러나야 하는데,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가라지인 줄도 모르고 나섰다가 창피를 당합니다. 자기 자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누가 무엇을 권유한다 하더라도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올랐다가 드러나는 허물들이 하나 둘 씩 보여 주게 되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 그런 줄 몰랐는데 그랬구나.” 또는 “그럴 줄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을 몰랐어.”하면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본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 기를 쓰고 그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자기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절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가라지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심을 나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면서 “알곡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