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 사건. 정순왕후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 벽파의 행동이 옳다고 말을 하지만 남인들은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손바닥으로는 자신의 눈은 가릴 수 있을 지언정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단지 사도세자의 죽음만을 바라봄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조의 부친인 숙종에게는 본래 세 아들이 있었으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나이까지 장성한 왕자는 왕위에 오른 경종과 영조 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건강이 약하다는 이유로 왕위계승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종은 당시 정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노론이 아니라 힘이없는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노론은 장희빈에 의해 폐위 되었던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노론측은 차츰 권력을 강화하여 끝내는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사사시켰다. 그리고 경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론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경종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경종은 너무도 유약하여 소론을 제대로 지지해주지 못하였다. 노론이 득세하는 정국에서 경종은 한 나라의 절대군주이면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론은 노론을 몰아내려 하였고, 노론은 영조를 통하여 후일을 도모하려고 왕의 건강을 핑계로 연잉군(영조)를 왕세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종은 육체적인 나약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약하였다. 경종은 자신의 병약함과 나약함으로 인하여 언제나 노론의 주장을 수락하였고, 연잉군(영조)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노론은 더욱 노골적으로 경종을 몰아붙였다. 연잉군(영조)이 세제로서 대리청정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것마저도 허락하였다.
경종을 밀고 있던 소론은 노론의 처사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경종은 1721년 소론의 뜻을 받아들여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처벌하였다. 또한 소론은 이듬해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냈다. 이 두 사건을 일컬어 ‘신임사화’라 한다.
노론과 소론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노론은 영조를 왕위 계승자로 확립시키려 했던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다고 주장하였고, 소론은 노론의 이런 행위가 경종을 배반한 것이었고 이를 막으려 한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신임의리’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조는 소론측 스스로가 신임사화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게끔 하였다. 결국 영조의 입장과 노론의 주장이 합세하여 신임의리에 대한 논란은 노론측의 주장대로 귀결되었다. 이로써 노론은 영조와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런데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는 노론의 독주를 깨닫고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 듯 하다. 삼척동자라도 노론의 독주가 \’신임의리\’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아마도 사도세자는 노론측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부정함으로써 노론이 독주하는 정국을 뒤바꾸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노론에게는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뒤흔드는 위협이었을 것이고, 노론으로서는 사도세자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의 생각은 영조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통치 중반에 노론 중에서도 홍봉한 등 외척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지지하는 세력인 부홍파였고, 다른 하나는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파였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파는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그의 장인 홍봉한도 궁지에 몰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신임의리를 노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영조 자신의 뜻과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늘 사도세자를 무고하였고, 영조는 자주 사도세자를 불러 꾸짖었다고 한다. 또한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는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였고, 결국 이 일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정신병자라고 하여, 광폭하다고 하여 아들을 죽일 부모가 어디 있을까? 설사 아들이 그렇다 하면 세자자리를 폐하고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하였다. 영조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도세자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조정은 노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노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왕실에도 커다란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조는 왕실이 입을 피해를 미리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을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를 정신분열증으로 몬 이유도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그의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가족에게도 유리했을 것이다. 신임의리 문제를 왕을 대신해 대리청정 하는, 이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거론한 것과, 한갓 정신병자가 횡설수설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도세자의 사건에서 비정한 아버지 영조는 종묘사직을 걱정하였고, 노론을 비롯한 정순왕후는 자신들의 이익을 걱정하였다. 정순왕후는 나경인을 시켜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었지만, 영조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을 보호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지켰고, 마침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게로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이제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 사건. 정순왕후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 벽파의 행동이 옳다고 말을 하지만 남인들은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손바닥으로는 자신의 눈은 가릴 수 있을 지언정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단지 사도세자의 죽음만을 바라봄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조의 부친인 숙종에게는 본래 세 아들이 있었으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나이까지 장성한 왕자는 왕위에 오른 경종과 영조 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건강이 약하다는 이유로 왕위계승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종은 당시 정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노론이 아니라 힘이없는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노론은 장희빈에 의해 폐위 되었던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노론측은 차츰 권력을 강화하여 끝내는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사사시켰다. 그리고 경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노론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경종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경종은 너무도 유약하여 소론을 제대로 지지해주지 못하였다. 노론이 득세하는 정국에서 경종은 한 나라의 절대군주이면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론은 노론을 몰아내려 하였고, 노론은 영조를 통하여 후일을 도모하려고 왕의 건강을 핑계로 연잉군(영조)를 왕세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종은 육체적인 나약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유약하였다. 경종은 자신의 병약함과 나약함으로 인하여 언제나 노론의 주장을 수락하였고, 연잉군(영조)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노론은 더욱 노골적으로 경종을 몰아붙였다. 연잉군(영조)이 세제로서 대리청정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경종은 이것마저도 허락하였다.
경종을 밀고 있던 소론은 노론의 처사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경종은 1721년 소론의 뜻을 받아들여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처벌하였다. 또한 소론은 이듬해 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냈다. 이 두 사건을 일컬어 ‘신임사화’라 한다.
노론과 소론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노론은 영조를 왕위 계승자로 확립시키려 했던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다고 주장하였고, 소론은 노론의 이런 행위가 경종을 배반한 것이었고 이를 막으려 한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신임의리’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조는 소론측 스스로가 신임사화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게끔 하였다. 결국 영조의 입장과 노론의 주장이 합세하여 신임의리에 대한 논란은 노론측의 주장대로 귀결되었다. 이로써 노론은 영조와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런데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는 노론의 독주를 깨닫고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 듯 하다. 삼척동자라도 노론의 독주가 ‘신임의리‘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아마도 사도세자는 노론측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부정함으로써 노론이 독주하는 정국을 뒤바꾸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노론에게는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뒤흔드는 위협이었을 것이고, 노론으로서는 사도세자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의 생각은 영조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통치 중반에 노론 중에서도 홍봉한 등 외척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다. 그런데 노론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지지하는 세력인 부홍파였고, 다른 하나는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파였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파는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그의 장인 홍봉한도 궁지에 몰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신임의리를 노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영조 자신의 뜻과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늘 사도세자를 무고하였고, 영조는 자주 사도세자를 불러 꾸짖었다고 한다. 또한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는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을 상소하였고, 결국 이 일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정신병자라고 하여, 광폭하다고 하여 아들을 죽일 부모가 어디 있을까? 설사 아들이 그렇다 하면 세자자리를 폐하고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하였다. 영조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도세자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조정은 노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노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왕실에도 커다란 타격을 입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조는 왕실이 입을 피해를 미리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을 것이다.
또한 사도세자를 정신분열증으로 몬 이유도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그의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가족에게도 유리했을 것이다. 신임의리 문제를 왕을 대신해 대리청정 하는, 이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거론한 것과, 한갓 정신병자가 횡설수설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도세자의 사건에서 비정한 아버지 영조는 종묘사직을 걱정하였고, 노론을 비롯한 정순왕후는 자신들의 이익을 걱정하였다. 정순왕후는 나경인을 시켜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었지만, 영조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을 보호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지켰고, 마침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게로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이제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