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교문(討邪敎文)
신유년의 참담한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그리고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해결되면서부터 진정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정에서도 이제 박해로 인해 동요된 민심을 수습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또한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건이 국제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등의 현한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동요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발표하였다.
“임금의 말씀이 이러하다. 하늘과 영광스러운 조상들이 우리나라를 은밀히 보호하심으로 악의 뿌리가 뽑히고 그 으뜸가는 두목들이 마침내 쓰러졌으므로, 온 조정과 나의 백성에게 그것을 알린다. …그들은 제사 드리는 것을 다만 헛되고 쓸데없는 일로 생각하고 …몇몇 몰락한 양반들이 정부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무뢰한들과 결탁하여 사회 여러 계급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문란케 하고 모든 관습을 타락시켰다. …그대들은 나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모두 선으로 돌아와 덕을 닦는데 힘쓰라.…”
대왕대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교의 원수라는 것을 신조화시키려 하였다. 이른바 ‘척사윤음’이라는 이 포고문은 천주교와 교도에 대하여 “매국노, 불효, 안녕질서의 문란자, 방탕”등 온갖 중상과 모략을 동원하여 박해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 토사교문은 신유박해의 종식을 알리는 문서였지만 이 문서가 존재하는 한 어느 때나 천주교를 박해할 수가 있었다. 신유박해는 약 100명의 순교자를 내는 한편 400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을 유배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