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

병오박해

헌종 12(1846)에 정부는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를 계기로 천주교에 또 박해를 가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가 해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김신부는 1846514일에 신자들과 함께 서해안으로 나가 529일에 관리들의 감시망을 뚫고 백령도에 도착하여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의 선원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기의 편지(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는 베르뇌 신부와 매스뜨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조선지도 등을 전달하고 황해도 순위도에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65일에 체포됨으로써 병오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의 강요를 받았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 대건 신부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그에게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두 장의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를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66월에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대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사실을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 신부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 대건 신부는 친구인 최양업 신부와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효심을 보이고 교우들에게는 신앙 강화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1846915일에 국사범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한강 새남터에 끌려 나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 박해는 김신부님과 관련되어 투옥된 현석문 등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된 외에 다른 희생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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