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병인박해

고종 3(1866) 대원군 치하에서 한국 교회 사상 최대의 가혹한 박해가 또 일어났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 박해의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초년에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고종 2(1865) 9()에 러시아인들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의 협조를 청해왔고, 이어 승지인 남종삼 등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맺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능히 러시아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만족히 여기고, 남종삼에게 한국 교회의 책임자인 베르뇌 주교를 만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준다면 천주교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황해도에서 포교 중이던 베르뇌 주교를 서울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그의 도착은 남종삼이 대원군의 요청을 받은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맞는 대원군의 태도가 변했고, 그 이유는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하여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청조의 위신은 물론, 한국의 고관들도 당황하여 피난갈 궁리에 바쁠 정도였다는 북경에서의 조선 사신이 보내온 서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의 보복으로 중국 도처에서 양인살육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이 닥치는 대로 살해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여기에서 큰 힘이라도 얻은 듯, 천주교를 증오해온 보수적인 정부고관들은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교섭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교도들의 탄압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구나 당시 운현궁에서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까지 들고 나오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고 선교사들의 체포에 서명하였다. 이 가혹한 박해로 한국에 있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남종삼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참수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불과 수개월 동안에 약 8천명에 달하는 교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생교회의 전통을 지닌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이루고, 후일 신앙자유의 날을 맞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숙원이던 교계제도의 설정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순교한 선인들 가운데서 103위께서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가해 자료실, 연중시기(가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