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결과

박해의 결과

기해박해로 서울에서는 200여 명,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각각 100여 명, 강원도와 경상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54명이 참수되었고, 옥사한 이들이 60명이었다.

 

기해박해는 정치적인 갈등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교우의 처형은 없었고, 집권층 외에는 박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위기위식은 강화되었다. 세 명의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한 것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를 외세의 적과 동일시하였다. 중국에서 있었던 황건적과 백련교도의 난을 잘 알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반국가 단체로 인식하였다.

 

박해의 영향으로 국경의 검문이 강화되어 서양 선교사들의 육로 입국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와 일부 조선인 밀사들만이 육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기해박해가 신유박해와 구분되는 점 중의 하나는 교회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을 담당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고, 중국에서 양성되고 있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곧 바로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길과 유대철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국청신문을 받게 되었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여 조선에 데리고 왔으며 이는 교회에 관련되는 일이며 역절(逆節)이 아니라 하고, 부귀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법(敎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단정하였다. 정하상도,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면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라에 해가 될 때 임금과 재상들이 이 교()를 금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백서가 주장한 소위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천주교 교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미 체포에 앞서 몇몇 교우와 함께 호교문(護敎文)을 만들어 당시의 재상인 이지연에게 제출한 바 있었는데, 이것이 신유년 박해 때 만들어진 황사영(黃嗣永)백서’(帛書)와 아울러 교회사상의 귀중한 자료이자 유일한 호교론(護敎論)<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정부는, 정하상과 유진길을 역적으로 몰아 결국 참형(斬刑)을 선고하였다. 조신철도 신앙을 끝까지 지켜서 소위 사서(邪書)를 강습하여 인심을 미혹하였다는 죄목으로 참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앞서 610()에는 이광렬(李光烈)과 여교우 7인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726()에는 박후재(朴厚載)와 여교우 5인이 같은 장소에서 참형되었다. 또한 725()에는 연경(燕京)에서 잡서(雜書)까지도 구입을 금한다는 하교가 내렸는데, 이는 사학에 관련된 문물의 수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814() 새남터에서 선교사 3인의 효수형이 거행되고 이튿날 서소문 형장에서 유진길, 정하상이 참형을 받았으며, 4일 뒤에 같은 곳에서 조신철을 위시하여 9명이 처형되었다. 선교사의 처형으로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고, 배신자 김순성은 교우를 고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리며 이지연 대신 우의정이 된 조인영(趙寅永)은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옥중 교우들을 교수형(絞首刑)에 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의 최초 희생자는 유진길의 아들 13세의 유대철(大喆)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론은 이같이 많은 처형을 염려하고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잔인성을 불평하기 시작하여, 이에 정부는 1018()에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한편 그간의 박해를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잔인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조인영이 제진(製進)하였던 척사윤음’(斥邪綸音)을 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서울과 지방에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전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남은 교우들의 형집행을 서둘러 1124()에는 최창흡(崔昌洽) 6명의 여교우들을 참수하고, 조인영은 옥중의 교우들을 옥에서 비밀리에 처형케 하였다. 1227()28()에는 박해를 끝내려는 의도에서인지 박종원(朴宗源), 이문우(李文祐) 10명을 새남터 못미처 당고개의 사장(沙場)에서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다.

 

기해박해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경기도와 수도(首都)에서 가장 큰 박해가 가해지고 순교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교우라면 전국적으로 박해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당시의 기록인 긔해일긔의 목격자담과 김대건(金大建) 신부 등이 순교한 1846년의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뽑아 교황청에서는 192575일에 이들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기해박해는 천주교와 관련된 세력을 정치적으로 분쇄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1845년엔 조선교구의 제3대 페레올(Ferreol, ) 주교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을 동반하고 입국하였다. 박해가 심하고 규모도 전국적이었던 만큼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유식층(有識層)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복음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박해 때마다 교우들이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점차 지방종교로 변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신앙의 견지에서 박해의 결과는 역시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교회의 고유한 무기인 피와 눈물을 통한 승리인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일긔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 옥중에서 고문 또는 병들어 죽은 교인이 60명이나 되었다. 기해박해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나 규모가 광범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유식층의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 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퍼져나갔다.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변해간 것이 특징이었다. 교우들은 산간벽촌으로 모여 신앙의 이상촌을 이루는데 힘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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