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행동에 대해서 궁금해 했고, 그런 권위를 어디에서 받았는지도 궁금해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요한이 메시아나 엘리야이기에 세례를 베푼다고 처음에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1,25) 라고 묻습니다. 그런 존재도 아니면서 왜 세례를 주느냐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에세네파 사람들은 빈번한 목욕재계를 통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고, 매일 매일 물에 잠기며 일일 세례를 베푸는 침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유일회적인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속죄일에 행하는 죄의 공개적인 고백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요한의 경우 고백이 개별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유대교가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 대사제에게 부여한 사죄의 선포권을 수시로 행사함으로써 성전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비춰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유대교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였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쇄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는 차별 없이 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리사이파의 배타적인 행위와는 대조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의인과 죄인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들 모두를 회개 안에서 일치시켰습니다. 그렇게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선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왜 세례를 주는 지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한 증언으로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임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6-27)

요한의 세례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을 알리기 위해 수행되는 물의 세례일 뿐입니다.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시다는 말씀은 요한 자신은 알고 있지만 당신들은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이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 앞에서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하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오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미리 선포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으며, 종은 주인의 신발 끈이라도 풀어드릴 수 있는데, 자신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겸손한 고백은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 또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좀 더 겸손하게 말하고, 좀 더 겸손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고,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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