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49년 부활대축일에 상해에서 마레스까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5월에 요동 지방으로 가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부주교인 베르뇌 장 신부 밑에서 7개월 동안 병자 방문, 성사 집행, 교리 교육 등의 활동으로 사목 실습을 하셨습니다. 1849년 11월 말에 최양업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의 명령을 받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중국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두고 최양업 신부님만이 교우들과 함께 12월에 보초들이 세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로 건물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한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최양업 신부님은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안 신부님을 문병하여 병자성사를 베풀고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님을 방문하여 귀국 인사를 드린 후에 전라도에서부터 12년 동안의 사목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6개월 동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에 있는 교우촌을 순회하면서 예비자를 찾아 세례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베풀고 미사성제를 집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처음에 순회 방문 중에 외교인들의 고발을 받아 체포될 위험도 겪었으나 철종의 즉위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 방문 중에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특히 외교인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여교우들에게 집안 식구 모르게 성사를 베푸셨습니다. 또한 그는 주민들의 병고에 동정하여 간질, 각혈 부종 등의 원인이 나쁜 물에 있다고 판단하고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약과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로그레조아 신부님께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목활동에 헌신한 최 신부는 피로와 병고에 시달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활동 이외에도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셨습니다. 당시 다블뤼 신부님을 도와 교회사 자료를 수집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에 보내어 후에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발간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신부님께서는 기도서인 「성교 공과」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신자들의 신심 강화와 교리 지식의 심화에 이바지하셨습니다. 아울러 페레올 주교님께서 증인들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기해박해 중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와 여기에 첨부하여 병오박해의 순교자에 대해 불어로 기록한 개정 증보판의 「기해일기」 및 「병오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오늘날 교회사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교우들의 교리 지식 함양과 신심생활 활성화를 위해 조선의 전통적 가사 문학인 사사조 가사체로 「천주가사」를 저술하셨습니다. 이는 특히 글을 모르는 이들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들을 위해 저술된 것입니다.
조국 사목을 위해 헌신한 최양업 신부님은 사목활동 12년 만인 1861년 6월에 급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죽음에 대해서 베르뇌 주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최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 직분을 준수하여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혼 구원에 힘써 성공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서양 선교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있습니다.” 최 양업 신부님께서는 주교님과 신부들의 기도 가운데 베론에 묻히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