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말씀읽기: 루카21,5-19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마태 24,1-2 ; 마르 13,1-2)
재난의 시작 (마태 24,3-14 ; 마르 13,3-13)
2. 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에게 속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면 안 속습니다. 속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잘못된 것이 있기에 그가 속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남을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한 체, 잘하는 체, 이것이 옳은 체…,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속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예수님 시대에 아직 건축 중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기원전20/19년-기원후 63년) 고대 세계의 일곱 가지 경이(驚異 놀랍고 신기하게 여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하얀 대리석 건물은 화려하게 빛났고, 그 예물, 특히 성소의 문을 덮고 있는 황금 포도덩굴은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헤로데 왕이 바친 황금 포도나무는 가장 유명한 것인데, 황금 포도송이는 한 사람의 부피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광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아무런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한껏 장식된 성소를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도시를 도대체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과장일지는 모르지만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미터 반, 높이가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야 하지만 사람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있습니다.
나 또한 세상의 화려한 것들을 보고서 넋이 나가서 그것에만 관심을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건물, 좋은 집, 멋진 백화점, 맛있는 음식점에….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감탄을 진정 시키십니다. \”저것들이 지금은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어느 하나도 자기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다 무너질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매료되어서 하느님을 등지고 있습니까? 물론 삶의 어려움으로 바빠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바쁜 사람들은 더욱 하느님께 매달리려 하는데, 한가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무엇인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없을까요?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모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따르게 했지만 그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따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가짜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속여서 자신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다음 하느님 앞에 설 때 예루살렘 성전처럼 그렇게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를 묻습니다. ①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지를. ②그 큰 재난을 앞두고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와 같이 그렇게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하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가짜 그리스도. 펠릭스 총독 시대에도 이집트에서 온 한 열광가가 자기의 음성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자랑하며 약 3만의 백성을 모았다고 합니다. 튜다는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선전하여 추종자를 얻었고, 갈릴래아 사람 유다도 상당한 추종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 자칭 구원자들이 사기꾼들임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장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을 위한 척 하면서 말해주면서도 실지로는 자기 욕심을 챙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이끌어 준다고 하면서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따라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면서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소문들, 표징들을 보더라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일어날 것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유대의 묵시문학에서는 세상의 끝 날에는 전쟁과 반란, 그리고 그에 관한 상반되는 갖은 소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쟁과 반란들은 종말이 곧 온다는 징조가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징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종말론자들의 허무맹랑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고 슬기롭게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무서운 재앙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닥쳐올 일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재앙을 바라보면서 나를 통해서 파생되는 재앙은 어떤 것인지를 살피고, 내 행동을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회당과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를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 사도는 서른아홉 대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고, 죽을 뻔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2코린 11,24-25)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이 당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두셨습니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증언할 기회가 된 것입니다. 사도들을 박해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사도행전5,41 참조).
제자들의 큰 바람, 열렬한 소망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박해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법정은 복음의 설교를 위해 마련되었고, 감옥은 교회의 선교 활동을 넓혀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스테파노는 산헤드린 앞에 섰고, 바오로는 총독들 앞에 나타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흩어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런 박해 상황은 없지만 매 순간 예수님을 증언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가정에서 가족들과 이야기 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오해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직장 안에서, 그리고 운전을 하는 거리에서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제가 하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양보하겠습니다.”
사도들은 말로 예수님을 증거 하였고, 행동으로 그것이 옳음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말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조그마한 시련이라도 주어진다면 변해 버리고 맙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참고 견디며 변치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이 발생된다 하더라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제자들은 박해 때에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될 한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어떻게 항변할까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정에 섰을 대에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도록 미리 항변의 말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에게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말할 때에 함께 계시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탈출4,12).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 앞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고백하고 당신을 증언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순전히 인간적인 말솜씨와 인간적인 지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전에 야인시대의 김두환씨가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옥중에서도 맞아 가면서 일본에 굽히지 않는 그 모습, 자신의 신념을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 모습.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박해를 당했습니다. 김두환 보다 더 멋진 분들이 바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변호인이 되시고, 무엇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신 이 말씀은 교회 역사 안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그것을 믿고 침착하게 박해자들을 대한 반면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는 것뿐입니다.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에서 석총이라는 중이 궁예를 향하여 퍼붓는 독설. “당신은 미륵이 아니오.”라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던 석총.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진리와 목숨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떻습니까? 쓸데없는 것에 진리를 바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우리의 초대 교회에서 이벽의 아버지나 이승훈의 아버지가 얼마나 아들의 배교를 위해 노력했습니까?
“네 이놈! 네놈이 창조주를 믿어서 부모와 일가친척이 몰살을 당해도 좋다는 말이냐? 천주학쟁이들은 애미․아비도 몰라본다고 하는데 네가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을 해서 애미․아비가 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이 곧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너로 인해 이 애비가 벼슬을 잃는다면 그것이 이 아비를 위하는 일이겠느냐? 네 어미가 종으로 끌려가는 것이 네 어미를 위한 행동이겠느냐? 너를 낳아서 길러준 은공은 보답하지 못할망정 적어도 해는 끼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놈아! 어떻게 하겠느냐?”
………………………………………….소설 신유박해중 이승훈의 갈등에서…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친척과 친지들이 제자들을 적에게 넘기는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신앙 때문에 가정 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그런 분들에게 힘을 내라고 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신다면 더욱 성숙하고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신앙적인 교육을 안 시키는 데서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녀가 시험 때 성당에 가지 않더라도 부모는 자녀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권하지도 않습니다. 성당에 가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아이들이 성장하면 성당에 다닐까요? 자녀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가지 못한다면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자녀를 박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열정적으로 봉사를 하면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성당에 못 나오겠다고…,”자신은 따라 할 생각은 안 하고, 그를 못하게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 안에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들어나기에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미워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움을 당했고, 박해를 당했고, 목숨까지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한 것을 얻었습니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들이 목숨을 잃고 멸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하느님 나라를 향에 달려오는 사람들로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박해받는 교회를 지켜보시며 당신의 손을 그 위에 뻗으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는 얼마만큼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지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이가 살아 있습니다. 영혼이 죽지 않기에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겪는 어려움을 아주 작은 순간으로 보시고, 그 작은 순간에도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 놓는 신앙인들 때문에 행복해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축복을 준비하십니다. 결국 나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신앙 때문에 겪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좋은 결과를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고 그분께 의지합시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참고 견딘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먼 미래보다 지금 앞에 당면한 문제들이 나를 힘들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밀려옵니다. 신자들과의 갈등, 그리고 가족들과의 갈등…그런 갈등 속에서 가끔은 이런 분심도 듭니다. “내가 이러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좀 쉬었다가 성당 다니면 안 될까?”
이런 마음이 들었던 나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참고 견디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까운 형제자매들이 나를 현혹시키는 말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남을 현혹시키는 말은 무엇입니까? 거짓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혹시 내가 거짓 예언자는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2. 내 자녀나 가족에게 신앙을 권면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은 어떤 것이며, 그들과의 대화에서 말문이 막혀 버릴 때는 언제입니까?
3. 믿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찾아 이야기 해 봅시다. 또한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돌아봅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라고….
꾸중을 하시되
다독여 주시는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무서워 하지 마라…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참 마음깊이 와 닿는 말씀입니다.
매순간 아버지를 찾으면서도
어려움이 닥쳐오면 “왜?” 라고
한탄하며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한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내게 다가오는 위력의 그늘이자
헤어날 길이 없는 마지막임을 스스로 세뇌시키며
아버지를 뒤로한 채
다른 곳을 주시하진 않았는지….
제게 잘못이 있어
깨우침을 주시는 것임을 모른채
야속해하며 아버지만을 원망하며
단맛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적은 없는지…
위험한 곳으로 감에 미리 알려주시는
사랑의 표시임을 모른채 투정만 부리진 않았는지….
사랑의 꾸중이 저를 벌하는 미움으로만 알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모르고
등을 돌리려 하진 않았나를 생각해 봅니다.
눈이 있되 보지 못하고
가슴이 있되 느끼지 못하고
머리가 있되 생각지 못하고
몸이 있되 행하지 못하여
끝이 아니고 시작임을 모른채…..
사랑이신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성사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하시어
그 안에서 느끼는 삶이
작은 기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하루하루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제 모든 것을 맡기어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만을 믿고 의지하며
저의 모든 사랑을 드릴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