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1. 말씀읽기: 요한3,1-8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2. 말씀연구

새로 난다는 것.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난 다는 것.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날 수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소서! 성령님!”하면 “새로 나게 하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묵은 나는 버리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시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유다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있고 하니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 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밤은 마주 앉아서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볼 눈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회 혼란을 야기 시키는 선동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등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 안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옆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코데모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다른 유다인 지도자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삶이 아니라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성당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성덕이 뛰어나거나 하느님 나라를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현재의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땅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 말고, 나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의로운 삶으로 착각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고개를 들지 못하면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의 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코데모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 자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뱃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새로 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나는 것,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새로 나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은 구약성경에서 축복 또는 다시 태어남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입니다. 물이 넘치게 한다거나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메시아 시대에 땅이 비옥해지고 새로워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이사44,3).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모든 육 위에) 부어 주리라”(요엘2,28). 영광 받으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쏟아 부으심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현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런데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심이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새라면 참새? 아니면 비둘기? 아니면^*^  (웃자고 한번 해 봤습니다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① 하느님을 믿고 찬미와 경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②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③ 수덕생활을 통해서 과거의 악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의로운 삶으로 성숙시키고,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사람입니다. ④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육은 영적인 삶을 지향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며,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 안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삶은 영적인 삶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시고자 몸소 허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셨으며 죽음까지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으로서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희망과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① 두려움을 버리고 ② 공동체와 일치하며 ③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④ 서로를 도와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육적인 삶에 머무르려 하는 사람들은 이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내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끼고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연기 안 나는 쪽에 앉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한테만 연기가 올 때도 있습니다. 바람은 어디로 불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내가 원할 때나, 그분께서 원하실 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드십니다. 또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영적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육과 영.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② 새로 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나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노력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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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에 1개의 응답

  1. 엘리사벳 님의 말:

    저 스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때론 세상쪽으로 고개를 돌릴때도 있습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니까~~ 라고 하면서
    너무나 억울하거나 정말 아니게 하는 주위의 모습을 볼 때~
    그럴때 가끔은 세상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서 저를 묻고 돌이켜 보면 결국은 저의 부족임이 드러남으로 맘을 꾸짖고 다잡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저를 보지 못한다면 결국 아버지께로부터 등을 돌릴수도 있겠지만
    거울에 비춰진 저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망가질데로 망가진 모습!
    더이상 손을 쓰기 어려운 누추한 한 건물이 바로 저의 성임을 보게 됩니다.
    정신이 번쩍 든답니다. ㅎㅎ
    세상속에 세워진 건물이라면 손을 쓰기 어럽지만
    아버지의 그늘밑에 있던 건물은 손을 쓸 수 있음을 깨달았거든요.
    형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기에~~

    사실 전엔 새로남의 의미조차 모른채 어깨에 힘을 주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형식에 젖은 신앙생활이 최고인줄 알았나 봅니다.
    뒤늦게 철이 들은 지금은 말씀안에서 저를 묻으려 노력하고 있지요.
    끝이 없는것이 말씀입니다.
    매번 돌아오는 아침에 새로운 기지개를 펴듯이
    늘 아버지께 같은 인사를 드리면서 같은 수다만 떨순 없지요.
    새로운 인사와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반성으로 아버지께 인사하지요.
    각기 다른 메뉴로 멋진 상을 차려 아버지께 올리는 맘으로 하루하루 성숙하는 저의 모습을 드리려 노력합니다.
    아마 제가 아버지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노력해도 못다할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려고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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