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1. 머릿말
2. 본론
2.1 열두 예언서 중에 다섯 번째 책
2.2 저술연대
2.3 문학유형
2.4 신학적 테마
2.5 구조
2.6 1,1-3과 3,1-3a의 주석
3.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릿말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삼키고 내뱉을 수 있는 큰 물고기라든가 그 자리에서 즉시 사람에게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빨리 자라는 식물의 이야기는 아주 쉽게 우리를 양탄자에 실어 동화의 세계로 옮겨다 놓는다. 그렇다. 요나서는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어느 부분보다도 흥미있고 그래서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요나서가 담고 있는 정신을 외면한다면 하느님은 요나를 영영 큰 물고기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요나서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일은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함을 잊지말아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여기서는 요나서의 소예언서 안에서의 위치, 저술 시기, 문학 유형, 신학적 테마, 그리고 구조에 대해서 알아 보겠다. 그리고 주석에 있어서는 본문을 모두 하지 못하고 병행구절인 1,1-3과 3,1-3a을 비교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2. 본론
2.1 열두 예언서 중 다섯 번째 책1)
BC 2세기 초에 씌여진 집회서를 보면 48장과 49장에 엘리야와 엘리사(48,1-16), 이사야(48,20 이하), 예레미야(49,6-7), 에제키엘(49,8) 그리고 욥(49,9)에 대한 언급을 하며 그 끝 49,10에서 열두 예언자2)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열두 예언자들의 책”이 그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나서도 비록 그것이 예언에 관한 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는 예언적 말씀들의 모음집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예언서들과 성격이 다를지라도 그때 예언 작품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요나서는 3,4b에 유일한 짧은 예언적 말씀을 담고 있다.
요나서는 히브리 성서의 열두 소예언서 중 다섯 번째로 언급이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연대기적인 이유와 내용적인 이유에 의한 것 같다. 편집자는 여로보암 2세 시대(BC 787-747)에 살았던 요나라는 예언자를 2열왕 14,23-25로 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서들의 표제어들도 남유다의 왕 우찌야와, 동시대 인물인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을 말하고 있으며, 호세 1,1에서는 이어지는 남유다의 왕들인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 반면 미가 1,1을 보면 우찌야는 언급이 안되고 이후의 3명만 언급되고 있다. 여기까지에서 요나는 호세아와 함께 여로보암 시대의 인물이고, 미가는 여로보암과 동시대인 우찌야 때는 없었고 그 이후인 요담 때부터 있었으므로, 요나는 미가보다 앞서 살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요나서와, 마찬가지로 시기를 알 수 없는 오바디야서는 어떻게 아모스서 다음으로 요나서보다 먼저 나열되었을까? 편집자는 그를 1열왕 18,3 이하의 엘리야시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궁내대신으로 나오는 오바디야로 생각했을 것이며 그 오바디야는 여로보암 시대의 요나보다 전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오바디야가 요나서보다 앞에 배열된 것 같다. 내용적으로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요나 1,1은 어떤 것에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국가들에게 보내진 선포자에 관해 말하고 있는 오바디야 1장에 의해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바디야의 메시지처럼 요나의 메시지도 이방인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바디야 다음에 요나가 이어지는 이 순서는 LXX에도- 비록 앞의 6권의 순서는 히브리성서와 다르지만3) -나타난다. 여기서 예언서들의 순서는 책의 길이에 의해서 정해진 것 같은데 요나는 오바디야보다 더 긴데도 불구하고 오바디야의 뒤에 위치해 있다. 아마 이것이 의도하는 바는 나훔이 니느웨를 언급하기에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요나서를 나훔 바로 앞에 둔 것 같다.
2.2 저술 연대
위의 집회서에서의 언급으로 보아서 요나서는 BC 2C가 시작되기 이전에 씌여졌음엔 틀림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요나에서와 같이 유배 이전이라는 추측은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부분이 귀양 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어휘에 대해서 보면 요나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많은 단어들을 보여 주는데 그것들은 에제키엘 시대 이후에만 특히 역대기, 전도서, 다니엘서 등의 구약의 후반 작품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예를 들면 관계대명사 절이 1,7.12; 4,10에서 Ꚇ로 이끌어 진다. 그리고 요나서의 전형적인 단어들 חꗢꗫ(1,5 선원), לꔪꖓ(1,6 선장), םꖹꗫꚋꕘ יꕚꗟꔤ(1,9 하늘의 엘로힘), הꗺꗪ의 피엘(2,1; 4,6-8 명하다. -하게하다), 고된 일에 쓰는 동사 לꗫꘝ(4,10 노동하다) 그리고 숫자 וֹבּꙞ(4,11 萬) 등이다.4)
두 번째로 요나서는 다른 성서적 자료들과 연관성 있는 단어나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 요나서의 처음 시작의 말5)은 엘리야-엘리사의 자료들에서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요나서와 이들 자료들 사이의 더 가까운 연관성은 엘리야의 보고에서 나타난다. 1열왕 19,4을 보면 「그는 죽여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인데, 이것은 요나 4,3 「야훼님, 당장 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와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계속해서 1열왕 19,5에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와 요나 1,5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도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나서는 엘리야와 같이 자연과 연관된 기적을 포함하고 있고 끝으로 요나처럼 엘리야도 외국에 설교를 위해 파견되고 있다 (1열왕 17,8-24)6)
이외의 병행구는 요나 3,9a; 4,2b와 요엘 2,13b.14a를 들 수 있다. 요나서는 하느님께서 니느웨의 심판을 거두시는 것을 기대하는 이야기이며 요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거두시는 것을 기대하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Limburg은 요엘서의 시기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리고 누가 누구로부터 인용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병행구는 요나서의 저술 연대를 아는데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한다.7) 그러나 Wolff는 그 내용으로보아서 요엘서는 이스라엘만을 이야기하고 요나서는 이민족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므로 요나서가 더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즉 요나서는 요엘서가 아직 모르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의 말에 대한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두 책은 모두 다양한 그들의 더 초기 전승에 의존하는데 요나서가 적어도 더 후대의 것에 연관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요엘에 대한 연구는 이것이 요나서가 4세기 중반 이전에 씌여질 수 없음을 의미함을 나타낸다.8)
Limburg은 끝으로 논제에 의해 그 시기를 좁혀 보려고 하였다. 니느웨의 왕이 공적으로 선언한 3,9-10의 하느님의 마음의 변화는 예레 18,7-8; 26,3에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인 BC 609에 대해 말한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imburg은 이러한 언어에 대한, 문학에 대한, 논제에 대한 고찰이 요나서의 저술 연대를 결정해 주지 못한다고 한다. 단지 예레미야 이후이며 신명기와 열왕기 후서 이후 그리고 후기 유배기 또는 귀환 후의 시대를 나타낸다고 말한다.9)
Weiser는 한마디로 편협한 선민 사상에 젖어 이방민족을 경멸하는 유다인들을 향해 그들의 거만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경향이 짙은 점으로 보아 저술 시기는 유배 이후로 보고 있다.10) 이는 이사야 44장과 45장의 제 2이사야- 바빌론 귀양 후에 활동 -의 보편적인 구원 사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Landes는 이상에서의 포로이후 시대를 지시해주는 북이스라엘-페니키아어나 아람어적 언어현상이 모두 다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히브리어에 사용되고 있었고 요나서에 나오는 것들 가운데 확실히 오직 포로이후 시대에만 쓰이던 용어들은 거의 하나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연대 결정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고 일축한다. 또한 그는 이책이 에즈라-느헤미아가 이룬 역사의 결과로 이루어진 편협한 국수주의 및 배타주의적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쓰여졌다는데 오래동안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로 하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이 책을 쓸 때 기본적으로 포로이후시대의 동료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밝힌 곳은 이 책 내용 가운데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증거에 의하면 구약의 예언자 전집 전체가 기록되고 편집된 것은 BC 500년 경으로 밝혀졌기에 요나서는 신명기적 이사야를 전후한 6세기 경에 씌여졌다고 한다.11)
이상에서 요나서의 저술 연대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BC 2C 이전이란 점 뿐이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의견의 일치를 못보고 있는데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 시기를 좁혀 본다면 Wolff의 의견대로 유배에서 돌아온 후, 후기 페르시아 시대나 초기 헬레니즘 시대쯤일 것 같다. 그리고 바다. 큰 물고기, 삼키어짐과 토해냄에 의한 구조, 추첨을 통한 죄인 찾기 등은 헬레니즘에 알려진 모티프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Wolff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씌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12)
2.3 문학 유형 (Literary Genre)
먼저 요나서에 다른 예언서들처럼 예언자의 전기적 요소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1,1의 “아미때의 아들 요나”란 구절 이외에는 요나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으며 단순히 2열왕 14,25의 요나를 상기시키고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요나서의 요나는 야훼 하느님을 믿는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고 봐야지 역사적 인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곧 요나서는 전기는 아니다.
요나서는 신화나 동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의 체험이나 아주까리 그늘의 일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단편들을 보면 문서화될 당시에는 독립된 전승들이었던 것이 후대의 개작과 편집에 의해 그 하나하나가 명확히 구별되지 않은 채 예언서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즉 요나서는 서로 다른 문학적 소재와 유형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하나의 전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13) 단 시편만이 독자적인 것이었는데 후대에 요나의 말 안으로 삽입된 듯하다. 따라서 이것 전체를 전설로 보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모티프들이 주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Landes는 요나서가 신화적 또는 민간전승적 요소에 역사적 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특정한 교훈을 목적으로하는 단편소설(novella)이라고 한다. 즉 이야기(narrative 또는 story)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Limburg도 같은 의견을 개진한다. 그는 요나서의 처음 시작 יꕙꖾꕰ14)은 요나서가 ‘이야기’임을 말해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말은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에스터, 느헤미야의 시작과 같기 때문이다.15) 이야기(story)는 크게 두 종류 즉,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이야기들16)과 지어낸 이야기들17)들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요나서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후자의 이야기들은 그중 어느 것도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각자는 힘 있는 메시지를 소지하고 있다. 요나서는 어떤 목적을 갖고 역사적 사건들 주변에서 발전된 소설적인 이야기 (fictional story)라고 말해질 수 있겠다. 이것은 이 이야기의 큰 물고기의 크기나 종류 등은 상상에 맡겨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메시지 만큼은 탕자의 비유의 메시지 만큼이나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뜻한다.18)
덧 붙이면 Claus Westermann은 이야기는 긴장(tension)의 싯점에서 그 긴장의 해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요나 1,1-3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예언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악한 도시 니느웨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긴장을 갖게 된다.
이제는 요나서가 이야기라는 문학적 범주 안에서 더욱 정확히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이 짧은 책은 무려 14개의 질문을 갖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1장에서는 모두 요나에게 그 질문이 던져진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요나가 하느님께 묻고 있으며 3장에서는 니느웨의 왕이 질문하고 4장에서는 요나가 화가난 질문을 하느님께 하고 하느님이 요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신다. 1장에서의 8개 질문은 청중을 요나의 위치에 놓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요나 이야기는 1,9에서 요나가 나는 히브리인이라고 말했듯이 유대인의 개개인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문학들이 이러한 질문의 사용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시편, 전도서, 욥기 등의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둔 지혜문학들이 그렇다. 따라서 빈번한 질문의 사용은 요나서가 어떤 교훈적인 목적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런 이유 말고도 요나서는 함축적(간결)이고 거의 교의적인 진술들19)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점이 교훈적인 것의 그 다른 이유가 된다. 따라서 질문의 사용과 신학적 선언 등은 요나서가 교훈적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감을 말해주고 있다.20)
여기서 이 함축적이고 교의적인 내용을 가진 요나서는 일종의 미드라쉬21)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요나서에 나오는 각 부분들을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의 각 부분들을 나타내는 요소로 이해하여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22)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 것은 교훈적 이야기 차원에서의 요나 예언자의 경험과 이스라엘 역사 사이의 어떤 정확한 일치성을 기대하지 않고 다만 비유로 보는 경향이다. 즉 요나는 그냥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즈라 시대의 편협하고 비관용적인 국수주의적인 유대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리해 본다면 요나서의 장르는 이야기인데 지혜문학적 요소와 미드라쉬적 요소, 그리고 알레고리적 요소를 띤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2.4 신학적 테마23)
요나서는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① 하느님은 세상(자연의 세계)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고, 돌보신다.
폭풍 장면의 중간(1,9)에서의 요나의 고백은 하느님이 바다와 마른 땅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이야기한다. 이 진술은 요나서를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에 관한 구약성서의 전승에 있어서 주요한 구절24) 가운데 하나로 위치시키고 있다. 또한 하느님은 거대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퍼 붓고(1,4), 뜨거운 열풍이 불게 하시고 해가 내리쬐게 하시며(4,8),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고(2,1), 식물을 자라게 하고 말라 죽게 하신다(4,6-7).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돌보심은 4,11의 “많은 가축들”에서 표현된다. 그 동물들은 니느웨의 회개에로 참여했다. 요나서의 마지막 말은 바다와 마른 땅을 갖고 있는 지구가 그곳에 살고 있는 수십 수백만의 인간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② 하느님은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자들을 구하신다.
큰 물고기에 의해 구해진 요나는 그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세 가지 진술이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관해 말하며 청중(유다인)들에게 신학적 증언으로서 의도되어지고 있다. “숨막히는 데서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2,3a). ……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도 야훼님 잊지 않고 빌었더니(2,8a) …… 저를 구해주실 이 야훼 밖에 없습니다(2,10b).” 요나는 죽음으로부터 극적인 구출을 체험했다. 여기서 그는 그 체험에 대해서와 구원해주신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③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염려하신다.
4,2b의 요나의 교의적 진술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전형적인 성서적 표현이다. 이 전체 이야기에서 유일한 이스라엘 후손은 요나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동정, 인내 그리고 사랑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만일 이야기가 1,16에서 끝난다면 요점은 명백해질 것이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지마라!” 그러나 하느님은 요나와 일을 계속하신다. 그를 구해주시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며, 그의 불쾌한 언동을 참아내시며, 인내로이 그를 가르치시려 노력하셨다. 도망가는 어린 아이일지라도 그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처럼 하느님의 백성 중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러한 전통적인 속성은 4,2에서 새롭고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기능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을 향한 동정심 있고, 자비로우며, 화에 더디시고, 불변의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또한 세상의 백성인 니느웨 사람들도 염려하신다.
④ 하느님은 벌을 주기로 한 당신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신다.
하느님은 어떤 법률이나 판결에 의해서 구속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하느님은 공포된 재난- 예언자에 의해 공포되었을지라도 -을 취소하신다. 하느님은 항상 이렇게 할까? 니느웨 왕은 “누가 알겠는가?”25)라고 대답할 만큼 충분히 착한 신앙인이다.
⑤ 주님은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이시다.
저자는 이방인 뱃사람의 신앙심(1,5-6)과 종교의식(1,7)을 묘사하는 점으로 보아 종교의 다원화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뱃사람은 그들 스스로의 종교를 통해서 참된 신을 찾으려고 시도하도록 허락되지 않고 단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숭배자가 되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하느님의 예언자의 메시지에 응답한다.
⑥ 끝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감사, 증거, 그리고 찬미로 응답하도록 초대된다. 뱃사람들은 곤경에 처했고 구원되었으며 하느님께 숭배를 드림으로써 응답했다. 요나는 물에 빠졌으나 구원되었고 증거와 찬미의 말로 그리고 숭배의 행동으로 응답했다.
2.5 구조26)
요나서는 대칭과 균형이 잘 표현된 문학 작품이다. 즉 1,1-3과 3,1-3a의 병행구에 의해 명확히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 병행구는 두 부분의 시작 부분을 넘어서 확장된다. 이야기 전체의 네 부분 중에서 첫 부분과 세 번째 부분 그리고 두 번째 부분과 네 번째 부분이 서로 대응된다. 1장과 3장에서의 요나는 어떤 사회적 상황에 처한다. 즉 그들의 지도자 아래서의 어떤 이방인 집단이 하느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2장과 4장에서 요나는 요나 외의 등장인물 없이 하느님과 대화한다.
구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책의 다른 부분들 간의 조화 넘어서 실제적인 부분들의 구성에까지 확장된다. 규칙을 입증하는 예외가 1,1-3인데 그것은 3,1-3a과의 대조에 의해서 일부러 불완전한 구조를 갖는다. 하느님의 명령에 나타나는 동사 םוּק27) (arise 일어나라)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료는 전에 갔었음(go)과 맞지 않는다. 그 목적은 이런 불일치에 의해서 요나의 불순종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적인 불일치를 균형잡는 것처럼 3절은 이야기의 기본 단위(subunit)로써 조심스럽게 구성된다.
1,4-16은 훌륭한 동심구조(concentric structure)28)를 보여준다.
A 4-5a : 이야기와 두려움의 응답
B 5b : 뱃사람의 기도
C 5c-6a: 이야기
D 6b : 선장의 말
E 7a : 뱃사람의 말
F 7b : 이야기
G 8 : 뱃사람의 말
9.10a : 요나의 진술과 두려움의 응답
G’ 10b : 뱃사람의 말
F’ 10c : 이야기
E’ 11 : 뱃사람의 말
D’ 12 : 요나의 말
C’ 13 : 이야기
B’ 14 : 뱃사람의 기도
A’ 15-16a : 이야기와 두려움의 응답
여기서 11b는 이야기 대신 직접 화법으로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12b가 11b에 답이 된다. 16의 마지막 두 문장은 보충적 부연으로 본 구조의 밖에 놓여있다. 이 부분은 던짐, 바다,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2,3-10의 시편은 3개의 연(3-5, 6-8, 9-10)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 개의 연은 후렴과 모티프- 응답된 기도, 위기, 추방, 확신 -들의 병행구가 나타난다. 첫 모티프는 첫째 연의 시작과 둘째 연의 끝에 나타나고 나머지 3개의 모티프는 양쪽에 같은 순서로 나타난다. 2,10은 1장 끝의 희생과 맹세의 주제를 취한다. 즉 요나는 뱃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
3,1-3a(1,1-3의 상응부)는 어휘의 조심스러운 반복에 의해 한 단위로 구분된다. 2절에 신적 위탁의 용어인 「일어나라-가라-선포하라」가 3절 이하에서 단계에 따라 취해진다.
3,3b-9도 요나의 설교(3b-4절),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5절), 왕의 응답(6절), 백성들의 응답을 강화시킨 왕의 선언(7-9절)으로 나뉜다. 뒤의 세 부분에서 모두 베옷이 언급된다. 첫번째와 세 번째는 병행구이다. 즉 단식, 베옷 그리고 두 개에 관련된 모습이다. 세 번째 부분은 첫번째의 반복뿐 아니라 발전이다. 니느웨의 회개를 다룬 전체가 뱃사람의 하느님께 대한 숭배의 표시를 이야기한 1장과 병행으로써 의도되었다. 3,9은 희망에 대한 그것의 임시적인(가설적인) 표현과 이상적인 마지막 구절 안에서 1,6과 대응한다.
1장과 3장에서 핵심어는 ‘אꙜꙌ 부르다, 부르짖다’이다. 이 말은 1,2; 3,2.4의 예언적 도입부에서, 그리고 1,6.14; 3,5.8의 이방인의 반응과 관련된 계속되는 이야기 안에서 사용된다. 또 다른 핵심어는 ‘עꘞꙜ 악하다’로 1,2.7f; 3,8.10; 4,1f.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3,10의 하느님의 은총은 2,1에서의 그것에 의도적인 병행구이다. 즉 요나의 당연한 파멸에서부터의 구원은 니느웨에 대한 관대함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4,1-3의 요나의 불평은 2,3-10의 그의 찬미 노래와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모두 비슷한 도입부- “요나가 야훼께 기도했다” -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시편 부분을 없애면 책의 대칭이 망가진다. 하느님의 변합없는 사랑과 요나의 생명과 관련하여 시편에서의 세 개의 핵심어29)가 4,2에서 그 반향을 발견한다. 시편에서 요나의 찬미를 앞으로 이끌어낸 주제들은 공교롭게 요나의 두 번째 기도에서 그를 슬픔에 젖게 하는 바로 그것들이 된다. 1,14이 4,2이하의 의도된 상응부라는 주장은 이야기 도입의 균형을 무시한다. 1,14의 제한된 유사성들은 확실히 뱃사람의 기도를 상기한다. 마치 타르시스에로의 도주의 언급이 1,3.10을 회상시키듯이 말이다.
4,4-11은 2,11과 병행구로서 자연의 이용과 야훼의 말씀에 의한 응답이다. 만약 길이가 기준이라면 두 부분은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이 두 번째와 네 번째 일화에 있어서 2,11보다 훨씬 긴 4,4-11은 4,2보다 훨씬 긴 2,2-10에 의해서 균형이 이루어진다.
4,4-11에서 4-5절과 9-11절의 목적은 하느님의 세 가지 행위와 관련되는 6-8절의 중심부에 대한 틀로서의 기능이다. 그 틀의 주제는 니느웨 도시와 관련된 요나의 화에 있어서의 불합리성이다. 이 결론 부분은 4,2이하가 1,3.14를 회상시키듯이 신중히 이전의 자료들로 되돌아간다. ‘ןꗫꖾꕰ 그리고 -에게 해주셨다’의 세 번 사용은 하느님의 진노와 은총에 대한 앞에서의 표현인 바다와 물고기를 회상시킨다. 대구적으로 지금은 식물과 벌레로 대치되었다. 반면 바람은 폭풍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반향된다. 10절은 1,6.14; 3,9의 ‘דꔨאָ 멸망하다30)’를 반복하고 있다. 마지막 절은 놀라운 방법으로 1,2과 3,2 두 곳 모두에서 시작으로 나왔던 “위대한 도시 니느웨”라는 핵심어를 재사용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실마리들이 이야기가 주의 깊게 짜여진 구성으로 되게 해준 어떤 절정 안에서 함께 풀어진다.
이상에서 알아본 바에 의해 구조를 짜본다면
I. 구원받은 한 히브리 죄인 (1,1-2,11)
A. 요나의 불순종 (1,1-3)
B. 요나의 벌; 이방인의 숭배 (1,4-16)
C. 요나의 구조 (2,1-11)
1. 하느님의 은총 (2,1)
2. 요나의 찬미 (2,2-10)
3.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 (2,11)
II. 구원받은 이방인 죄인들 (3,1-4,11)
A. 요나의 순종 (3,1-3a)
B. 니느웨의 회개 (3,3b-9)
C. 요나의 비난 (3,10-4,11)
1. 하느님의 은총 (3,10)
2. 요나의 불평 (4,1-3)
3.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 (4,4-11)
2.6 1,1-3과 3,1-3a의 주석31)
1장 1-3 : 요나의 불순명
1 야훼의 말씀이 아미때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어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3 이 말씀을 받고도 요나는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타르시스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요빠로 내려갔다. 거기서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배 삯을 내고 남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가기 위해)32) 배에 탔다. 야훼의 눈앞을 벗어날 셈이었다.
이 이야기는 매우 박진감 있게 시작한다. 이 첫번째 장면은 하느님, 요나, 니느웨 사람들, 뱃사람들 등의 등장 인물과 니느웨, 타르시스, 요빠, 배 등의 장소, 그리고 요나에게 니느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행동이 시작된다. 요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간다. ‘야훼 앞에서 벗어남’과 그 장소인 ‘타르시스’의 연결이 두 번이나 계속되는데 이것이 여기서의 정점이다.
1절은 ‘יꕙꖾꕰ 그리고 (지금) -이 일어났다’로 시작한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설화문학(narrative)인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에스터, 느헤미야 그리고 에제키엘서 등의 전형적인 도입부이다. 이런 말들은 신명기적 역사서33) 안에서 전형적인 관용구를 만들었다. 이 관용구는 엘리야 이야기34)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요나란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뜻한다. 동물에서 이름이 취해진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에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아미때의 아들 요나”는 2열왕 14,25에서 언급된 예언자와 이 책의 주인공을 동일시 하게 해주고 있다. 그 예언자는 이 성서의 첫 청중과 독자들에게 친숙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는 여로보암의 업적에 대한 보고서에서 요나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 줄이겠다.
2절에서 예언적 위임의 전형적인 형태인 “일어나라-가라-하여라”35)의 관용구에 의해 요나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오직 엘리야와 요나만이 외국에 파견되어진다.
이야기의 시작으로 니느웨에 관해 두 가지가 언급된다. 니느웨는 “저 위대한 도시”36)로 불리워지며 3,2.3과 4,11에서 다시 언급된다. 도시에 대해 ‘לוֹדꔿ 위대한’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성서에서 드문 일이다.37) 요나서의 처음과 끝에서 고대의 광활한 수도를 상상케 한다. 니느웨는 또한 ‘사악한 (עꘞꙜ)’도시로 묘사된다. ‘그들의 죄악(םꚓꘝꙜ)’이 하느님의 주의를 끈 것이다.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는 이 도시의 첫번째 특성을 이해시켜 주지만38) 성서 저자는 두 번째에 촛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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