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님,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토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갈 때 일어나는 두려운 마음,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이런 저런 경우를 언제나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좀 믿어 달라고. 내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그 답을 풀 수 있는 진리요, 평온함을 주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갈 때 일어나는 두려운 마음,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이런 저런 경우를 언제나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좀 믿어 달라고. 내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그 답을 풀 수 있는 진리요, 평온함을 주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지 알아봅시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해 본다면 그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고, 그 길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길이십니다.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기에 나는 그분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시려고 당신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바치실 것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길로 표현하심으로써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하셨다. ➀ 예수님은 제자들의 처지와는 다르다. 제자들처럼 자신에게는 길이 필요치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길이 되셨다. ➁ 길과 목표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구원은 계시자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길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또한 길은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그리고 다시 성부께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의 여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➀ 허위나 거짓에 반대하면서 생각과 의도를 말하는 것. ➁ 거짓에 반대하면서 사실과 일치하여 표현되는 사고, 말, 가르침. ➂ 올바른 실천에 대한 가르침. ➃ 이성, 논리 또는 과학적 탐구의 규법을 따르는 선언이나 이론”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이 중의 어떤 것과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는(히브리어: emet 에멧)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해를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에멧(emet)의 신학적 의미는 하느님의 행동, 계시,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믿고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즉 하느님의 말씀, 약속, 하느님의 충실함을 조건 없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존재는 하느님의 신뢰, 충실 그리고 진리에 의해 살 수 있는 것이며, 이로써 삶의 근본적인 항속성과 안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에 의지하며 신앙 안에서 진리를 행함으로써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진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때만이 내가 자유로울 수 있으며,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 사고와 연관시켜 볼 때, 생명(영원한 생명)은 구원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계시가 제시하는 모든 것의 핵심 단어입니다. 인간생명의 필수조건은 음식, 의복, 주택 등입니다. 하지만 보다 충만한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수준 내지는 문화적 가치들을 향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인간적 삶은 오직 하느님과의 통교를 통해서만 완전히 충족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신앙인이 하느님과의 통교가 없는 삶은, 즉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삶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깊은 초자연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벌써 아버지께 대한 인식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인식은 아버지께 대한 인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정말 멋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의 부모님은 누구일까? 어떻게 자녀를 저렇게 아름답게 성장시켰을까?…자녀를 보면 그 안에서 부모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도 알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벌써 아버지를 보았다고 확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이번에는 필립보 사도가 봉창을 두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이었고,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아버지를 보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제 자매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는 모세(탈출33,18),혹은 이사야서(6장)에도 있었던 그런 하느님에 대한 감각적인 계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자 야훼 하느님께서는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모세에게 허용된 가장 큰 권한은 하느님의 뒷모습만을 보는 것이었습니다(탈출33,18-2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느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립보의 청은 아직도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필립보가 믿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충분치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뭔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나를 봤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생명과 행동이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하느님을 계시하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신앙이 없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모든 일이 결국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모든 의지는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을 보여주는 통로요, 하느님께로 인도해주시는 길입니다. 즉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필립보의 청은 아직도 그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필립보의 믿음은 확실했지만 충분치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답답하십니다(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
하지만 필립보만 그렇게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지금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셨던 것을 회상시키십니다. 자신이 말씀하실 때는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또 행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즉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들어서 믿게 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을…그래도 못 믿겠다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필립보의 모습은 지금의 나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을 하십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일들!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치유하시고…”이 모든 일들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그 일들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 가셨지만 예수님의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아니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안 들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사가 순조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바란다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잘 기도한다면 그것은 훨씬 순조롭게 되어 갈 것이다.”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질 때 나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보다는 세상을 위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들어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내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안 들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만사가 순조롭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바란다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잘 기도한다면 그것은 훨씬 순조롭게 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즉 공동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온 마음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청할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까요?
3.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님 안에서 길을 찾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고, 어떤 생명을 원하고 있습니까?
2. 필립보의 청은 우리 모두의 청일 것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들을대신해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형제 자매의 모습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내가 보여 주어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워 놓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3.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기도는 아버지와 동시에 직접 예수님께도 이르고 그분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그들의 청을 듣고 또 도우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사도직을 다하기 위한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나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지 나의 기도를 들여다 봅시다.
4.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고 하면 결국 분열되는 것을 많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일을 위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