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만나와 메추라기(탈출16,1-36)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또 불평하였습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16,3)
배고픔은 하느님의 은총을 잊게 만들고, 모세의 봉사와 희생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이 밀려오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의 가치를 굶주림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름대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이들이 그런 불평과 불만을 퍼트렸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굶주림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음식과 잠자리라 할지라도 자유를 누릴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삶은 영원히 지속될 삶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때 이 백성의 원로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향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주님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너희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 불평한 것이다.”(탈출16,7.8)
사랑은 사랑으로 갚고, 호의는 호의로 갚아야 합니다. 당연한 권리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계속되는 불평은 모세를 지치게 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들은 모세가 말한 대로 주님께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됩니다.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 홍해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게 해주신 분,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신 분,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분! 그분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 아홉 명의 유다인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7-18)라고 말씀하시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의 모습은 훗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부모가 바뀌지 않으면 자녀들도 바뀌지 않습니다. 내일의 자녀들의 모습은 오늘의 부모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① 불평
사람인지라 불평할 수 있습니다. 불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없다면 그는 분명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불평은 감사의 기억이 사라질 때 살며시 고개를 들고, 어느 순간 당연함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서운함이 하나 둘 생겨날 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마음은 감사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감사함이 마음을 채우고 있을 때는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도 기쁨과 찬미가 흘러나옵니다. 고난 속에서의 찬미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경 속에서의 배려는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이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감사로 나 자신을 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고,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안에 감사가 채워지지도 않고, 내 입에서도 감사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내 모습을 선명하게 보게 만들고, 내 안에 담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기에 탈출기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눔 17: 이스라엘 백성은 굶주림을 겪게 되자 이집트 종살이 하면서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먹던 것을 추억하며,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모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잠시 모세의 마음이 되어서 서운하고 당황스러운 마음들을 표현해 봅시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으니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지치고 힘들수록 하느님께 더욱 의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
인간의 본성은 그러했나 보다.
그 본성을 사랑과 감사로 감싸 안아야 존중과 배려가 나오는데
감싼 것이 없으니 본성이 알몸 그대로 나왔나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이 백성의 모습은
영도자인 모세의 힘을 빠지게 만들고,
공동체를 은총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출애굽이라는 은총은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고,
눈앞에 펼쳐진 굶주림이나 갈증, 두려움은 모두 모세 탓으로 돌려버리고 있다.
이 백성의 자유를 위하여 그렇게 노력했건만
종살이에 길들여진 이 백성은
온갖 악한 말들을 만들어 내어 모세에게 쏟아붓고 있다.
사랑 때문에 “예”하고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죽을 짓을 한 것처럼 몰아붙이며
하지 말아야 될 말들만 골라서 모세에게 쏟아붓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힘들고 지치면 불평하고 원망을 하게 된다.
이 백성은 더 나아가 종살이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참으로 악한 존재들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조금의 인내도 할 줄 모르는 존재,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 또한 이해하려 하신다.
긴 시간 노예 생활은 인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눈치와 순간의 안락함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 적응해 왔으니
삶의 모습을 바꾸는데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주시고,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치면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셨나 보다.
그렇게 기회를 주시나 보다.
그러니 기회를 주실 때 이 백성은 받아들여야 한다.
계속되는 노예근성은 결국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도 하는 사람이 계속 한다.
그렇게 불평하고 또 불평하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감사할 줄 모르고,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하느님의 사람을 계속해서 흔드는 사람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계속되는 불평이 몸에 달라붙으면
약속의 땅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은총에서 멀어진 인간의 끝은 결코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본성을 사랑과 감사로 감싸 놓아야 한다.
사랑과 감사로…,
②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생한다는 것도 알고 계시고, 배은망덕하게 불평을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 백성을 이해해 주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이면 만나로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게 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16,4).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습니다. 메추라기는 시나이반도를 지나는 철새중의 하나입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16,15) 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여라. 너희 식구의 머리 수대로 한 오메르씩, 저마다 자기 천막에 사는 이들을 위하여 가져가거라.”(탈출16,16)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에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을 때는 저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이고, 아무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되어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자연현상에 따른 것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자연현상이라면 일정 기간, 일정 장소에서 볼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매일 먹었고, 엿샛날에 거둔 양은 평일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나를 보관하도록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것을 한 오메르 가득 채워 대대로 보관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낼 때, 광야에서 너희를 먹여 살린 이 양식을 자손들이 볼 수 있게 하여라.”(탈출16,32)
모세는 “항아리 하나를 가져다 그 안에 만나 한 오메르를 가득 담아서, 주님 앞에 두어 대대로 보관하십시오.”(탈출16,33) 라고 명령하였고, 아론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언판 앞에 놓아 보관하게 하였습니다.
나눔 17: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은 어떠했을까요? 그것을 모아들이는 것을 바라보는 모세와 아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식사를 하고 있는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모세와 아론의 마음이 되어 봅시다.
하느님 백성은 가난함과 부족함 속에서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굶주림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백성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앞에 있는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시어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③ 하느님의 시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양식을 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엿샛날에는 똑같이 거두어 들여도 음식을 만들면 두 배가 되도록 해 주시어 안식일에는 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믿고 양식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탈출16,5)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더러는 더 많이, 더러는 더 적게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오메르로 되어 보자,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욕심을 부린 이들이 생겼습니다. 욕심을 부린 이들의 남겨진 음식에서는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이렇게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마다, 제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안에서 모두 평등한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종살이하며 주인을 위해 살던 그들이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엿샛날에는 안식일을 위해 미리 음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고약한 냄새를 피우지도 않고 벌레가 꾀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이것을 먹어라. 오늘은 주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오늘만은 들에서 양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엿새 동안 너희는 그것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인 이렛날에는 아무것도 없다.”(탈출16,25-26)
하느님께서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쉼” 속에서도 평화를 못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일에 중독된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렛날에 백성 가운데 몇몇이 그것을 거두어들이려고 나갔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언제까지 내 계명과 내 지시를 지키지 않으려느냐? 보아라, 주님이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래서 엿샛날에는 너희에게 이틀치 양식을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마라.”(탈출16,28-29) 그리하여 백성은 이렛날에는 쉬었습니다.
“숨과 쉼”
숨이 따뜻한 벽에 기댈 수 있으면 쉼이 되고
쉼이 그 따뜻한 벽에서 힘을 얻으면 생기 있는 숨이 됩니다.
숨은 생기 있는 기운이니 생기 있음으로 숨을 쉴 수 있고,
그 생기가 약해지면 삶의 자리에서 숨 막히게 됩니다.
그렇게 숨 막힌 삶은 생명을 숨죽이게 하고
생명의 기운은 그렇게 태양 아래 작은 웅덩이가 말라가듯 그렇게 메말라 버립니다.
숨이 생기 있어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 생기 있는 숨을 위해서는 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숨과 쉼은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생기를 더해갑니다.
주어진 삶에 끌려가며 바쁘게 숨을 쉬다보면
어느덧 연인인 쉼에서 멀어지게 되고,
연인에게서 멀어진 숨은 결국 생기를 잃게 됩니다.
몸도 쉬어야 하고 마음도 쉬어야 합니다.
몸이 쉬어야 생기 있는 숨을 쉴 수 있고,
마음이 쉬어야 기쁜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쉼이라는 벽에 기대어 깊이 있게 쉴 때,
생기 있는 숨을 내쉬며
삶의 자리에서 생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먼 길을 가는 순례자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지나가다
큰 나무를 만나면 그 나무 아래로 들어가 잠시 가던 길을 멈춥니다(休).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서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떠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큰 나무를 그냥 지나치는 순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그 큰 나무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되어 주고,
순례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는 생기 있는 숨을 쉬기 위해
자주 그 큰 나무 아래로 들어가 그 나무에 기대어야 합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생기를 얻고,
“삶의 꽃을 피우는 숨”을 내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은 그 나무를 일컬어 “십자나무”라고 합니다.
“십자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