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친한 친구끼리는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도 아이 때는 이름을 부르지만, 자녀가 성장하여 가정을 갖게 되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내 자녀도 누군가의 배우자이며, 누군가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존중을 담아서 부르는 것과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이름은 결코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결코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탈출20,7)
하느님의 이름은 존경과 흠숭의 대상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되고, 부당하게 불러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언제나 흠숭 받으셔야 하고, 거룩히 빛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부당하게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이 하느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요, 살아있는 신이라고 자처하는 파라오를 만났습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는 파라오는 자신의 통치방식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면 신전의 사제들은 “나일로미터”를 통해서 범람의 양을 계산해 내고, 그것에 기초해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또한 범람의 양을 미리 계산하여 파라오는 마치 자신이 범람을 주도하는 것처럼 말하며 축제를 주도했고,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파라오는 그렇게 신처럼 행동했습니다. 또한 파라오가 제사를 드리며 신탁을 청할 때는 제단 뒤에서 제관이 파라오의 말에 신처럼 응답하며 파라오의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들은 신이 아니지만 신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더 나아가 신의 이름으로 하느님 백성을 탄압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림해서도 안 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우상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헛되이 부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은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붙잡아 말하였습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예레26,8-9)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경건함과 열정이 있는 듯하지만, 단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존중해 주시고, 자신들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느 순간 하느님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박해하였듯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박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거짓 예언자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참된 예언자 중에 박해받지 않은 예언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통치자들과 백성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언자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신명18,20)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하느님 백성은 사제들이 제단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제 개인의 말로 들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제단과 강론대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독서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방법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들은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서도 마치 하느님과 동격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있기에 하느님께 자비를 청할 일도 없고, 아무런 아쉬움도 없기에 하느님께 기도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매일 미사에 참례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타성화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지 취미생활을 하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삶은 변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사람을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냉담자”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나눔 20: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핑계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개인의 잘못을 합리화하며, 개인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저주와 모욕을 퍼붓는 말들은 믿음이 없기에 쏟아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느님께는 모욕이 됩니다.
구교우촌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자주 하는 말이 “천주께 맹세”였습니다.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님께 맹세를 하면서 말했던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옳지 않은 일에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당 다녀도 소용이 없군.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다 그래?”라는 말도 듣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해주면서 “이제 당신은 사업이 성공할 것이고, 병이 나을 것이고, 대학에 붙을 것이며…,”라고 말하는 것도 하느님처럼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모습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재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